방송국이라는 공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지하 스튜디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건물. 미로처럼 얽힌 복도.
방금까지 수백 명이 웃고 박수 치던 공간이 녹화가 끝나는 순간 한꺼번에 텅 비어버리는 곳.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카메라에 찍히는 곳.
한국의 방송가에는 수십 년째 이어져 내려오는 괴담의 계보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걸 전부 꺼내봅니다.
마지막에는, 20년 동안 대한민국 전체가 귀신이라고 믿었던 어떤 여자의 이야기도요.

여의도의 밤
2014년까지 40년 가까이 한국 방송의 심장이었던 여의도의 옛 방송국 사옥들.
이 건물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창문이 없다는 것.
지하 스튜디오와 부조정실은 문을 닫으면 완전한 어둠, 완전한 무음이 됩니다.
야근하던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심야, 복도 끝 엘리베이터가 저 혼자 열렸다 닫힌다.
분장실 거울 앞을 지나가면 거울 속에서 뭔가가 한 박자 늦게 따라온다.

특정한 사건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냥 그 공간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밀폐, 심야, 정적.
괴담이 자라는 데 필요한 조건을 방송국은 전부 갖추고 있습니다.

또각이와 콜록이
방송가 괴담이 재미있는 건, 유령한테 이름까지 붙여놨다는 점입니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두 존재가 있습니다.
'또각이'.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 복도에서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만 다가왔다가 멀어집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비추면 아무도 없습니다.
'콜록이'.
어둠 속 객석이나 세트 뒤에서 콜록, 콜록, 기침 소리만 들립니다.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것.
출연자들이 예능 방송에서 직접 언급할 정도로 방송가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밤샘 작업이 일상인 스태프들은 이제 이 소리들을 들어도 그러려니 한다고 합니다.
"또각이 왔네."
그게 더 무섭습니다.

귀신을 찍던 곳에 귀신이 온다
1977년부터 이어진 한국 납량물의 대명사, 전설의 고향.
처녀귀신과 구미호를 수십 년간 '제작'해온 현장에는 묘한 구전이 쌓여 있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확인해 보니 카메라에 잡힌 그림자가 현장 인원보다 하나 더 많았다.
소복 소품이 밤사이 다른 자리에 옮겨져 있었다.
분장을 다 지운 배우가 거울을 봤는데 거울 속 얼굴이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귀신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매일 모이는 장소에서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가 저절로 자라납니다.

시대가 멈춘 가짜 마을
사극 오픈세트장은 낮과 밤이 완전히 다른 공간입니다.
낮에는 관광객이 북적이는 조선시대 테마파크.
밤에는, 사람이 한 명도 살지 않는 집만 가득한 마을.
문경새재의 대형 세트장이나 용인의 드라마 촬영지에서 밤샘 촬영을 해본 스태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와집 툇마루에 누가 앉아 있길래 보조 출연자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없었다.
소품 초롱불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철거를 기다리며 방치된 옛 세트 골목에서 인기척이 났다.
애초에 사람이 살라고 지은 집이 아닌, '마을의 형상'만 있는 공간.
밤의 오픈세트장은 그 자체로 무대 뒤의 무대입니다.


새벽 세 시의 청취자
방송가 괴담에서 라디오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새벽 생방송. 밀폐된 부스. DJ와 엔지니어 단둘.
그리고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얼굴 없는 청취자들.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이렇습니다.
분명 아무도 걸지 않았는데 스튜디오 내선 전화가 울린다.
사연 게시판에 접수된 적 없는 사연이 올라와 있다.
새벽에 신청곡을 보낸 청취자에게 다음 날 확인 연락을 하니 "그 시간엔 자고 있었는데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심야 라디오는 반세기 동안 잠 못 드는 사람들의 벗이었습니다.
그 벗이 어떤 밤에는, 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


빈 객석의 박수
공개 녹화가 끝난 직후의 스튜디오를 상상해 보세요.
10분 전까지 수백 명이 웃고 박수 치던 공간이 순식간에 텅 빕니다.
세트를 정리하던 스태프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빈 객석 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린다는 겁니다.
한두 명이 치는 것 같은, 드문드문한 박수.
조명을 켜 보면 접이식 의자들만 가지런히 비어 있습니다.
방송가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웃음이 가득했던 자리일수록 비었을 때 가장 차갑다고.


그리고, 화면에 찍힌 것들
여기까지는 소리와 구전의 이야기였습니다.
지금부터는 다릅니다.
수백만 명이 실제로 본, '화면에 찍힌 것들'의 이야기입니다.
1997년, 대한민국을 뒤집은 흰옷의 여자
1997년, 가수 이승환의 5집 수록곡 '애원'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됩니다.
지하철이 등장하는 장면.
달리는 열차의 기관실 창문에 기관사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서 있었습니다.
흰옷을 입은 여자.
기관실은 기관사 혼자 타는 공간입니다. 당시 규정상 외부인은 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자 나라가 뒤집혔습니다.
뉴스가 이 장면을 다뤘고, "노이즈 마케팅 자작극"이라는 소문까지 돌자
이승환 측은 원본 필름을 공개하고 기자회견까지 열었습니다.
법영상 전문가의 감정 결과는 소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합성이 아니다."
합성이 아니라면, 저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정답이 나온 것은 무려 20년이 지난 2018년이었습니다.
한 방송에서 그 지하철 기관사가 퇴직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 여자는 귀신이 아니라, 자신의 지인이었다고.
규정을 어기고 지인을 기관실에 태워줬던 것이라 그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고.
전문가 감정은 정확했던 겁니다. 합성이 아니었으니까요.
진짜 사람이었으니까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귀신의 정체는, 20년 묵은 무단탑승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서 있던 실루엣
2016년 7월, MBC 무한도전의 공포특집 '귀곡성' 방영분.
폐가 콘셉트의 세트에서 멤버가 미션을 마치고 나오는 장면 뒤,
어둠 속에 발을 모으고 똑바로 선 여성 형체의 실루엣이 잡혔습니다.
시청자들이 프레임을 정지시키면서 논란이 폭발했습니다.
"직전 장면에는 없던 사람이다."

이 소동의 결말은 시청자들이 직접 냈습니다.
문제의 실루엣이 영상 11초 지점에서는 왼쪽에, 44초 지점에서는 오른쪽에 있었던 것이 확인된 겁니다.
움직였다는 건, 사람이라는 뜻.
결론은 어둠 속에 서 있던 제작진이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반복됩니다.
어느 드라마 방영분에서는 학교 기둥 옆으로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잡혀 소동이 났는데,
시청자가 직접 촬영지에 찾아가 지형의 높이차 때문에 그렇게 보인 구경 나온 학생이었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어느 예능에서는 출연자들 사이로 몸통 없는 다리가 찍혔는데,
검은 옷을 입은 오디오 스태프의 몸이 어둠에 묻힌 것이었습니다.
방송 화면의 귀신은 대부분 이렇게 끝납니다.
스태프, 구경꾼, 조명, 착시.

이 서랍을 닫기 전에
방송가 괴담을 전부 늘어놓고 보면 패턴이 보입니다.
화면에 찍힌 것들은 결국 대부분 설명이 됩니다.
20년이 걸리든, 시청자가 밝히든, 언젠가는 정체가 나옵니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요.
문제는 카메라 바깥입니다.
또각이의 발소리를 찍은 카메라는 없습니다.
빈 객석의 박수를 녹음한 마이크도 없습니다.
새벽 3시의 신청곡을 보낸 청취자가 누구였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습니다.
방송국은 모든 걸 기록하는 공간이지만,
정작 스태프들이 겪었다는 일들은 단 하나도 기록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도 어느 스튜디오의 막내 작가는 텅 빈 복도에서 또각, 소리가 나면
뒤를 돌아보는 대신 이렇게 중얼거린다고 합니다.
"먼저 퇴근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