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허리에는 지도에서 지워진 땅이 있습니다.

폭 4킬로미터.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2킬로미터, 북쪽으로 2킬로미터.

길이 248킬로미터. 서해의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 고성까지.

비무장지대, DMZ.

70년 넘게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됐고 지뢰 100만 발 이상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도 수만 구의 전사자 유해가 수습되지 못한 채 흙 속에 있습니다.

이 띠 모양의 금단의 땅 남쪽 경계에는 'GP'라고 불리는 최전방 감시초소들이 섬처럼 박혀 있습니다.

스무 살 남짓의 젊은 군인들이 그곳에서 밤을 새워 어둠을 감시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하나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안고 전역합니다.

밤의 DMZ — 안개 낀 능선 위, 서치라이트가 어둠을 가른다.
밤의 DMZ — 안개 낀 능선 위, 서치라이트가 어둠을 가른다.

첫 번째 이야기 — 안개 속을 걸어오는 것

가장 널리 퍼진 GP 괴담은 언제나 같은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겨울, 새벽, 짙은 안개.

야간 경계 근무 중인 초병이 철책 너머 비무장지대 쪽을 응시하고 있는데,

안개 속에서 검은 사람 형체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옵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그곳은 지뢰밭입니다. 사람이 걸어서 통과할 수 없습니다.

둘째, 발소리가 없습니다.

셋째, 형체가 빠릅니다. 걷는 속도가 아닙니다.

초병이 경고 방송을 하려는 순간, 혹은 야시경을 고쳐 쓰는 순간,

형체는 사라집니다.

수십 년 동안,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수많은 전역자들이 각자의 부대에서 같은 것을 봤다고 말합니다.

어떤 목격담에서 그 형체는 요즘 군복이 아니라 구형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야시경 너머 — 나무들 사이, 저것은 나무인가 사람인가.
야시경 너머 — 나무들 사이, 저것은 나무인가 사람인가.

두 번째 이야기 — 사격장의 병장과 다섯 개의 그림자

한 부대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7월의 새벽 2시, 야간 사격장에서 인기척이 감지돼 5분대기조가 긴급 출동했습니다.

사격장 한복판에 같은 부대의 병장 하나가 낫을 든 채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부사수가 야시경으로 그를 살피다가 숨이 멎었습니다.

병장의 뒤로, 사람 형체의 그림자 대여섯 개가 줄지어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던 겁니다.

웅얼거리는 사람 목소리 같은 것도 바람에 실려 왔다고 합니다.

병장은 그날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됐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사격장 일대에서 공사와 조사가 이뤄졌을 때,

땅속에서 6.25 전사자들의 군번줄이 무더기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젊은 병사들이 매일 총을 쏘던 그 땅이, 70년 전 젊은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간 자리였던 겁니다.

1968년의 남방한계선 철책 — 이 철책은 반세기 넘게 같은 자리에 서 있다.
1968년의 남방한계선 철책 — 이 철책은 반세기 넘게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세 번째 이야기 — '불고기 GP'

전방 부대에는 불침번의 중요성을 가르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어느 GP에서 불침번이 잠깐 조는 사이 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했습니다.

초소 병력은 소리 없이 전원 살해됐고 내무반은 화염방사기로 불태워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발견된 내무반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탄 시신들이 벽과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그 초소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불고기 GP'.

이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된 바 없습니다.

교전이 잦았던 1960~70년대의 최전방을 생각하면 있을 법한 일이지만, "바로 그 초소"를 특정할 수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흥미로운 건, 전국의 서로 다른 부대들이 저마다 "우리 옆 GP가 바로 거기"라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검게 그을린 채 비어 있는 초소를 가리키면서요.

이 전설은 넷플릭스 드라마 D.P. 시즌2가 에피소드로 만들 만큼 한국 군대 괴담의 대표가 됐습니다.

해질 무렵, 능선 위에 홀로 선 초소.
해질 무렵, 능선 위에 홀로 선 초소.

네 번째 이야기 — 아무도 없는 초소의 불빛

병력이 철수해 비어 있는, '무인 GP'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도 없어야 할 폐초소에서 밤에 불빛이 보인다는 목격담.

끊겨 있어야 할 유선 전화가 울린다는 이야기.

과거에 사고가 났던 초소는 그 방만 폐쇄하고 벽 색깔이 다른 채로 남겨두기도 했는데, 그 방에서 인기척이 난다는 증언.

여기에는 그럴듯한 해명이 존재합니다.

무인초소의 이상 신호나 전화는 야생동물이 통신선을 갉아 합선을 일으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어둠 속의 그림자도 고라니나 멧돼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요.

DMZ는 70년간 인간이 비운 땅이라 멸종위기 동물들의 낙원이 됐으니까요.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다만 그 설명을 들은 전방 근무자들의 대답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직접 서 보면 그런 말 못 합니다."

임진강변의 위장 초소 — 강 건너편에서도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있다.
임진강변의 위장 초소 — 강 건너편에서도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있다.

다섯 번째 이야기 — 이 땅은 거대한 무덤이다

여기서부터는 괴담이 아니라 기록된 사실입니다.

강원도 철원의 화살머리고지. 6.25 전쟁 최후반의 대격전지였고 지금은 DMZ 안에 있습니다.

2019년부터 이곳에서 전사자 유해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3년 동안 나온 유해가 약 3,092점. 잠정 424명분. 유품은 1만 7천여 점.

70년 동안, 젊은 병사 수백 명이 아무도 모르게 그 흙 속에 있었던 겁니다.

1953년 그 고지에서 전사한 한 이등중사의 유해는 2019년에야 수습됐습니다.

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아들은 칠순 노인이 되어 DNA 검사로 아버지를 다시 만났습니다.

66년 만의 부자 상봉이었습니다.

DMZ 괴담이 유독 사실처럼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땅 아래에는 실제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잠들어 있습니다.

안개 낀 철책선 — 이 철책 너머의 흙 속에, 아직 수만 명이 있다.
안개 낀 철책선 — 이 철책 너머의 흙 속에, 아직 수만 명이 있다.

여섯 번째 이야기 — DMZ가 삼킨 왕국

비무장지대 한복판에는 1,100년 된 왕궁터가 있습니다.

신라 말, 궁예라는 왕이 세운 태봉국의 도읍 철원성.

한때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꿈꾸며 지어진 도시였습니다.

궁예는 폭군으로 몰려 쫓겨났고 왕국은 사라졌고 도읍은 천 년 동안 잊혔습니다.

그리고 1953년, 군사분계선이 하필이면 이 폐허가 된 도성을 정확히 가로질러 그어졌습니다.

성터의 절반은 북쪽에, 절반은 남쪽에. 전체는 지뢰밭 안에.

역사학자도, 고고학자도,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 년 전에 버려진 왕의 도시가 이번에는 지뢰와 철조망으로 두 번째 봉인을 당한 겁니다.

평화를 꿈꾸다 몰락한 왕의 도읍이 한반도에서 가장 평화가 없는 땅에 갇혀 있다는 것.

역사가 만든 괴담이라면 이보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철원 노동당사 — 전쟁이 할퀴고 간 건물은 뼈대만 남은 채 그 시절에 멈춰 있다.
철원 노동당사 — 전쟁이 할퀴고 간 건물은 뼈대만 남은 채 그 시절에 멈춰 있다.

같은 철원 땅에는 포탄 자국이 그대로 남은 노동당사 폐허가 서 있습니다.

DMZ 일대에서는 폐허가 유적이 되는 데 70년이면 충분했습니다.

노동당사 정면 —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어둠이 들어차 있다.
노동당사 정면 —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어둠이 들어차 있다.

일곱 번째 이야기 — 돌아오지 않는 다리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

이곳에는 이름부터 서늘한 다리가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전쟁 포로들이 교환되던 다리입니다. 남과 북, 어느 쪽이든 한 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1976년 8월 18일, 이 다리 근처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한 그루의 가지를 치던 유엔군 병사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로 급습했습니다.

미군 장교 두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흘 뒤, 미군은 전폭기와 B-52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는 전쟁 직전의 긴장 속에서

그 나무를 베어버렸습니다.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세계가 전쟁 직전까지 갔던 곳.

지금도 이곳에서는 남과 북의 병사들이 몇 미터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판문점 — 파란 회담장 건물을 사이에 두고, 70년째 이어지는 대치.
판문점 — 파란 회담장 건물을 사이에 두고, 70년째 이어지는 대치.
경계 근무 — 이곳에서는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규정으로 정해져 있다.
경계 근무 — 이곳에서는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규정으로 정해져 있다.

여덟 번째 이야기 — 불 꺼지는 시간이 정해진 마을

DMZ 안에는 마을이 딱 두 개 있습니다.

남쪽의 대성동. 1953년 정전협정이 허락한 남측의 유일한 DMZ 마을입니다. 높이 99.8미터 게양대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겨우 800미터 거리에 북쪽의 기정동이 있습니다.

기정동의 게양대는 165미터. 대성동보다 높게 세우려고 경쟁적으로 올린 높이입니다. 인공기 무게만 275킬로그램.

문제는 이 마을입니다.

기정동은 사실상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건물들은 멀리서 보면 번듯하지만 상당수가 내부 없이 외벽만 세워진 선전용 껍데기라는 관측이 계속돼 왔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마을의 불빛이 정해진 시각에 일제히 켜졌다가 일제히 꺼진다고 전해집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 매일 밤 사람이 사는 척을 하는 겁니다.

70년째.

전망대에서 북쪽을 보는 사람들 — 망원경 너머의 마을은 오늘 밤에도 정시에 불이 켜진다.
전망대에서 북쪽을 보는 사람들 — 망원경 너머의 마을은 오늘 밤에도 정시에 불이 켜진다.

아홉 번째 이야기 — 괴담이 사실처럼 들리는 이유

전방 초소 괴담이 힘을 갖는 데는 어두운 배경이 하나 더 있습니다.

2005년 6월, 경기도 연천의 한 GP에서 실제로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한 병사가 내무실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잠들어 있던 동료 여덟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고립된 최전방 초소에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괴담이 아닙니다. 가해자가 있고, 희생자가 있고, 지금도 아파하는 유가족이 있는 실제 사건입니다.

이후 한국군 전체가 병영 문화를 뜯어고치는 계기가 됐습니다.

몇 년 뒤 '고립된 GP에서 소대원들이 하룻밤 새 몰살당한다'는 공포영화가 개봉했을 때, 관객들이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헷갈려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실제 사건과 무관한 창작이라고 밝혔습니다.)

밀폐된 초소, 고립, 어둠, 총.

DMZ 괴담은 유령 이야기이기 이전에, 그 안에서 청춘을 보내는 사람들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라전망대 — 남쪽에서 북쪽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창.
도라전망대 — 남쪽에서 북쪽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창.

열 번째 이야기 — 지뢰 100만 발 위의 낙원

마지막은 DMZ 그 자체입니다.

이 땅에는 지뢰가 100만 발 이상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70년째 아무도 걷어내지 못했고 정확히 어디 묻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뢰를 밟아 발목이 잘린 멧돼지, 철책에 걸려 굶어 죽는 고라니가 실제로 관측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인간이 사라진 이 죽음의 땅은 한반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생태계가 됐습니다.

멸종 위기의 두루미들이 겨울마다 철원 벌판으로 돌아오고 산양과 수달과 반달가슴곰이 지뢰밭 위를 지나다닙니다.

사람의 마을이 있던 자리는 숲이 삼켰습니다.

정전 직후 그대로 멈춘 기차역과 녹슨 철마가 덩굴에 감긴 채 서 있습니다.

지뢰 — 해골 표지판 뒤의 풀숲은 70년째 아무도 밟지 않았다.
지뢰 — 해골 표지판 뒤의 풀숲은 70년째 아무도 밟지 않았다.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는 지뢰 표지판들 — 이 선을 넘는 생명은 사람이 아니다.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는 지뢰 표지판들 — 이 선을 넘는 생명은 사람이 아니다.

이 서랍을 닫기 전에

DMZ 괴담을 하나씩 뜯어보면 결국 한 가지 사실에 도착합니다.

안개 속의 검은 형체도, 사격장의 그림자들도, 불고기 GP도,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수십 년째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땅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수만 구의 유해가 아직 흙 속에 있고 천 년 전의 왕궁이 지뢰밭에 봉인돼 있고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 매일 밤 불을 켜는 곳.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런 땅이라면,

무언가가 걸어 다닌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요.

오늘 밤에도 그 248킬로미터의 어둠을 스무 살의 초병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안개가 끼면, 그들은 조금 더 오래 철책 너머를 바라봅니다.

안개 낀 새벽의 지뢰밭 — DMZ에서는 풍경 그 자체가 괴담이다.
안개 낀 새벽의 지뢰밭 — DMZ에서는 풍경 그 자체가 괴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