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이 있다.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되고, 표지는 낡았으며, 240여 쪽에 걸쳐 촘촘한 손글씨가 이어진다. 겉보기에는 중세 유럽 어디에나 있었을 법한 평범한 필사본이다. 그런데 이 책을 펼친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같은 벽에 부딪힌다.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세상에 알려진 어떤 언어로도, 어떤 문자로도 쓰여 있지 않다. 페이지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식물의 삽화가 그려져 있고, 별자리 같은 원형 도표가 돌아가며, 초록빛 물에 몸을 담근 벌거벗은 여인들이 관을 타고 이어진다. 20세기 최고의 암호학자들이 달려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의 암호를 풀어낸 군의 해독 전문가들이 도전했으며, 최근에는 인공지능까지 투입됐다. 그러나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예일대학교 바이네케 희귀본 도서관이 'MS 408'이라는 번호로 소장 중인 이 책의 이름은 '보이니치 필사본(Voynich Manuscript)'. 흔히 '세상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책'이라 불린다.

알 수 없는 기호로 뒤덮인 오래된 양피지 필사본을 펼쳐 놓은 모습 (AI 생성 이미지)
알 수 없는 기호로 뒤덮인 오래된 양피지 필사본을 펼쳐 놓은 모습 (AI 생성 이미지)

실재하는 책, 그러나 읽을 수 없는 책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보이니치 필사본은 도시 전설이나 인터넷 괴담이 아니라,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이다.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예일대학교의 바이네케 희귀본·필사본 도서관 서고에 지금 이 순간에도 보관돼 있다. 고화질로 디지털화된 전체 페이지가 온라인에 공개돼 있어,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이 기묘한 책을 넘겨 볼 수 있다.

이 책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비교적 정확하게 밝혀져 있다. 2009년, 애리조나대학교 연구진이 필사본의 양피지 조각을 떼어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을 실시했는데, 검사한 모든 표본에서 일관되게 1404년에서 1438년 사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즉 이 책의 재료인 송아지 가죽 양피지는 15세기 초에 준비된 것이다. 이 측정 결과는 매우 중요하다. 오랫동안 이 책이 후대의 정교한 위조품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었지만, 양피지 자체가 6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면서 근대 이후의 날조라는 가설은 사실상 배제됐기 때문이다. 크기는 대략 가로 16센티미터, 세로 23센티미터 정도이고, 원래 272쪽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약 240쪽이 남아 있다. 손때가 유난히 많이 묻은 부드러운 양피지는, 이 책이 장식용이 아니라 누군가 실제로 반복해서 넘겨 보던 '쓰이던 책'이었음을 시사한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 15세기 초로 확인된 낡은 양피지의 질감 클로즈업 (AI 생성 이미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 15세기 초로 확인된 낡은 양피지의 질감 클로즈업 (AI 생성 이미지)

세상에 없는 문자, 세상에 없는 언어

이 책의 핵심 미스터리는 결국 글자다. 필사본을 채운 문자는 흔히 '보이니치어(Voynichese)'라고 불리는데, 이는 정식 언어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이 책에 쓰인 정체불명의 글자를 가리키는 별칭일 뿐이다. 라틴 문자도, 그리스 문자도, 아랍이나 히브리, 한자나 그 어떤 알려진 문자 체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주요 글자는 대략 스무 개에서 스물다섯 개 정도로 파악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매끄럽게 흘러가듯 쓰여 있다. 글씨체 자체는 망설임 없이 유려해서, 쓰는 사람이 이 문자에 완전히 익숙했다는 인상을 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정체불명의 텍스트가 통계적으로 아무렇게나 지어낸 무의미한 낙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글 전체는 약 3만 8천 개의 단어로 이뤄져 있고, 그중 서로 다른 단어는 대략 9천 종에 이른다. 특정 단어가 특정 위치에서 더 자주 나타나거나, 단어 길이의 분포가 자연 언어와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등, 여러 통계적 특징이 실제 언어의 구조와 닮아 있다는 분석이 여러 차례 제기됐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라진 어떤 언어일까, 아니면 정교하게 암호화된 라틴어나 다른 유럽어일까, 그도 아니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창작 언어일까. 이 질문 자체가 100년이 넘도록 답을 얻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기호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촘촘히 흐르는 필사본 지면 (AI 생성 이미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기호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촘촘히 흐르는 필사본 지면 (AI 생성 이미지)

기이한 삽화들 — 없는 식물, 도는 별, 물에 잠긴 여인들

글을 읽을 수 없으니, 사람들은 자연히 그림에 매달린다. 필사본은 삽화의 성격에 따라 대략 여섯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식물' 구역이다. 126쪽에 걸쳐 온갖 식물이 뿌리와 잎, 꽃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문제는 그중 어느 것도 실제 지구상의 식물과 확실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여러 식물의 부분을 이어 붙인 듯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식물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운다.

이어지는 '천문' 구역에는 열두 개의 황도 12궁을 연상시키는 원형 도표가 등장하고, '우주론' 구역에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원형 메달리온들이 돌아간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기묘하다고 손꼽히는 것은 '생물학' 혹은 '목욕' 구역이다. 약 스무 쪽에 걸쳐, 벌거벗은 작은 여인들이 초록빛 액체가 흐르는 관과 욕조 같은 구조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장면이 반복된다. 이것이 당시의 의학적·해부학적 지식을 나타낸 것인지, 온천 요법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마지막으로 약초와 용기가 늘어선 '약학' 구역과, 별 모양 표시로 항목이 구분된 '조리법' 혹은 '처방' 구역이 이어진다. 각 구역의 그림은 무언가 체계적인 지식을 담으려 한 듯 보이지만, 정작 그 옆의 설명을 읽을 수 없으니 그림의 의미도 끝내 확정되지 않는다.

여러 식물을 이어 붙인 듯한,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약초 삽화가 그려진 중세 필사본 페이지 (AI 생성 이미지)
여러 식물을 이어 붙인 듯한,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약초 삽화가 그려진 중세 필사본 페이지 (AI 생성 이미지)
중세풍의 원형 천문도와 열두 궁을 연상시키는 별자리 도표 삽화 (AI 생성 이미지)
중세풍의 원형 천문도와 열두 궁을 연상시키는 별자리 도표 삽화 (AI 생성 이미지)

누가, 왜 이 책을 만들었나

책의 소유 이력은 17세기 무렵부터 조각조각 추적할 수 있다. 확인된 이야기의 큰 줄기는 이렇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가 이 책을 금화 600두카트라는 거액을 주고 사들였다고 전해지며, 그는 오랫동안 첫 소유자로 언급돼 왔다. 이후 이 책은 프라하의 연금술사 게오르크 바레슈의 손에 있었는데, 그가 1639년 로마의 저명한 예수회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에게 보낸 편지가 이 필사본에 관한 가장 이른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바레슈는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이 책의 정체를 밝혀 달라며 당대 최고의 언어·암호 전문가로 이름 높던 키르허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레슈 사후, 책은 프라하 카를대학교의 총장이었던 얀 마렉 마르치에게 넘어갔고, 마르치는 1665년 무렵 이 책을 키르허에게 보냈다. 이때 마르치가 함께 부친 편지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책의 저자가 13세기 영국의 학자 로저 베이컨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전하면서도, 자신은 그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다고 분명히 적었다. 이후 책은 예수회의 손을 거쳐 오랫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다가, 1912년 폴란드 출신의 고서적상 윌프리드 보이니치가 프라스카티 인근의 예수회 대학에서 이 책을 사들이면서 마침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오늘날 이 책을 부르는 이름도 바로 그의 성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모든 소유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도, 정작 15세기 초에 누가 이 책을 처음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실한 답이 없다.

촛불 아래 낡은 미지의 필사본을 들여다보는 중세풍 학자의 손과 책상 (AI 생성 이미지)
촛불 아래 낡은 미지의 필사본을 들여다보는 중세풍 학자의 손과 책상 (AI 생성 이미지)

최고의 해독가들이 모두 실패하다

보이니치 필사본은 20세기 들어 암호 해독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설적인 난제가 됐다. 도전한 사람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전설적인 암호학자 윌리엄 프리드먼과 그의 아내 엘리제베스 프리드먼, 제2차 세계대전기 영국군에서 활약한 암호 전문가 존 틸트먼, 미 해군 언어학자 프레스콧 커리어 등, 실제 전쟁에서 적국의 정교한 암호를 풀어낸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이 책에 매달렸다. 프리드먼은 수십 년에 걸쳐 이 필사본을 연구했지만, 결국 그가 이 책을 두고 남긴 결론은 '해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텍스트가 어쩌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언어일지 모른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내놓는 데 그쳤다.

시대가 바뀌면서 도구도 바뀌었다. 컴퓨터가 등장하자 통계 분석과 계산언어학이 동원됐고, 마침내 인공지능까지 이 오래된 수수께끼에 도전했다. 2018년에는 캐나다 앨버타대학교의 연구진이 자연어 처리 기법을 이용해, 이 텍스트의 바탕 언어가 중세 히브리어일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연구가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구진 스스로도 이 결과가 확정적인 해독이 아니라 '출발점'에 불과하며,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조합상의 우연일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도구가 아무리 발전해도, 결과를 검증해 줄 '정답'이 없다는 근본적인 벽은 그대로였다.

제2차 세계대전기 암호해독실을 연상시키는 낡은 책상 위의 서류와 필사본 사본 (AI 생성 이미지)
제2차 세계대전기 암호해독실을 연상시키는 낡은 책상 위의 서류와 필사본 사본 (AI 생성 이미지)

해독했다는 주장들, 그리고 반박

600년 동안 "드디어 풀었다"는 주장은 수없이 나왔다. 언론의 큰 주목을 받은 사례도 여럿이다. 2019년, 영국 브리스틀대학교의 한 연구자는 이 책이 사라진 '원시 로망스어(proto-Romance)'로 쓰인, 약초·목욕 요법·천문에 관한 정보를 모은 참고서이며 도미니코회 수녀들이 편찬한 것이라는 주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학계와 언어학자들로부터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곧바로 반박됐다. 그 밖에도 이 책이 사실은 아무 의미 없는 정교한 위조품, 즉 텅 빈 '헛소리'를 그럴듯하게 꾸며 만든 사기극이라는 가설, 특정 고대 언어나 방언으로 쓰였다는 주장 등 수많은 해석이 제기됐다.

여기서 반드시 강조해야 할 점이 있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해독 성공' 주장도, 학계의 독립적인 검증을 통과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개별 연구자가 몇몇 단어나 문장을 그럴듯하게 풀어냈다고 발표하더라도, 그 방식을 책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해 다른 연구자들이 동일한 결과를 재현해 내지 못하면 그것은 검증된 해독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보이니치 필사본은 바로 이 문턱을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다. 화려한 헤드라인은 반복해서 등장했지만, 예일대 도서관을 비롯한 학계의 공식 입장은 언제나 동일하다. 이 책은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이름 없는 미지의 필사본이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오래된 도서관의 서고 (AI 생성 이미지)
이름 없는 미지의 필사본이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오래된 도서관의 서고 (AI 생성 이미지)

왜 아직도 미스터리인가

600년이 지나도록 이 책이 미스터리로 남은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이 책에 관해 확실히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이 15세기 초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진짜 양피지에 진짜 잉크로 쓰였고, 누군가 오래도록 실제로 넘겨 보던 물건이라는 것도 안다. 글자에 일정한 규칙과 구조가 있다는 것, 그림들이 식물과 천문과 인체를 다루는 듯 보인다는 것까지도 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 — 이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가, 누가 무엇을 위해 이 책을 만들었는가 —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이 책이 자연 언어를 암호화한 것인지, 사라진 언어로 쓰인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아무 의미도 없는 정교한 껍데기인지조차 결판나지 않았다. 최고의 인간 암호학자와 최신의 인공지능이 모두 물러선 자리에서, 이 오래된 양피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나 이 책의 첫 문장이 마침내 소리 내어 읽힐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보이니치 필사본은 인류가 손에 쥐고도 끝내 읽어 내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책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