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0월 28일, 밤 열한 시.
서울 마포의 한 건물 앞은 낮보다 밝았습니다. 방송 중계차의 조명이 골목을 하얗게 씻고, 케이블이 아스팔트 위를 뱀처럼 기어 다녔습니다. 국내 방송사는 물론이고, 그날 이 좁은 골목에는 외신 기자들까지 카메라를 세워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사고도, 화재도, 시위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끝이었습니다.
건물 안에서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두 손을 하늘로 뻗었고, 어떤 이들은 눈을 감고 몸을 떨었습니다. 그들은 곧, 정확히 이날 자정에, 자신들의 몸이 그대로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이라 믿었습니다. 병든 몸도, 늙은 몸도, 어린아이의 몸도 — 남김없이. 그것을 그들은 '휴거(携擧)'라고 불렀습니다.
경찰 병력이 건물 주변을 둘러쌌습니다. 혹시 모를 극단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시계는, 아주 천천히, 자정을 향해 갔습니다.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 예언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이장림이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목회자라기보다 번역가였습니다. 해외의 기독교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오래 했고, 그 과정에서 서구에서 유행하던 종말론 서적들을 깊이 접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그는 스스로 예언서를 씁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이 책 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날짜를 꺼냅니다.
1992년 10월 28일 자정, 예수가 재림하여 참된 신자들을 하늘로 들어 올린다. 그리고 1999년, 세상은 완전히 끝난다.
날짜가 있는 예언은 위험합니다. 막연한 '언젠가'는 검증할 수 없지만, '언제'가 박히는 순간 그것은 사람들의 달력을 지배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장림의 예언에는 그 '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여러 구절과 숫자를 자기 방식으로 조합해, 마치 계산이 끝난 결론처럼 그 날짜를 제시했습니다. 그가 세운 단체의 이름이 '다미선교회'였습니다.
이런 믿음을 신학은 '시한부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끝에 정확한 시한을 매기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 이 믿음은 당시에도 한국 주류 개신교계로부터 강하게 배격당했습니다. 여러 교단이 이장림과 다미선교회를 공개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신도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이것은 특정 종교 전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이탈적 집단과 그를 따르다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날짜가 굳어지다
예언은 처음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는 사이, 그 날짜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다미선교회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베라선교회, 다니엘선교회, 성화선교회 — 비슷한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운 유사 단체들이 전국에 퍼졌고,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1992년 10월 28일'이라는 날짜를 공유했습니다. 정확한 규모는 지금도 논쟁이 있지만, 다미선교회가 해산할 무렵 그 신도 수만 약 8천 명 정도로 추산되었습니다. 여기에 전국의 수많은 유사 단체까지 더하면, 그 날짜를 믿은 사람은 훨씬 많았습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그 날짜에 맞춰 자기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10월 28일이면 이 세상은 끝나고 자신은 하늘로 올라갈 텐데, 그 뒤의 삶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재난'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것들
경찰이 확인한 피해 사례만 100건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이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어차피 세상이 끝날 텐데 공부가 무슨 의미냐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따라 온 가족이 신자가 된 경우, 어린 자녀들까지 학교를 나가지 않아 무단결석으로 퇴학 처리된 사례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직장을 버린 가장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철도 노동자는 근무 중에 종말 설교 테이프를 틀었다가 해고당했고, 받은 퇴직금 전부를 헌납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재산이 있었습니다. 천만 원 이상을 헌납한 신도가 30여 명에 이르렀고, 그중 일부는 10월 28일까지 쓸 생활비만 남기고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 부산의 한 신도는 1억 원어치 부동산을 팔아 넘겼고, 대구의 한 신도는 전세 보증금을 내놓았습니다. 다미선교회가 보관하고 있던 헌금 액수만 25억 원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서울 합정동의 한 신도는 '전도 활동'을 이유로 가족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암사동의 한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장성한 세 아들이 모두 신자가 되었고, 그중 둘은 '순교'를 하겠다며 사라졌습니다. 자녀의 학업을 막았다는 이유로 다투다 극단적 상황까지 간 가족의 이야기도 보도되었습니다.
군 탈영, 임신 중절 같은 극단적 소문까지 사회를 떠돌았습니다. 이런 극단 사례들은 그 진위를 하나하나 확인하기 어렵고, 그래서 이 글은 당시 언론과 수사로 확인된 범위 안에서만 절제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확인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웠습니다. 세상이 끝난다는 한 문장이, 수천 가정의 달력에서 '내일'을 지워 버렸으니까요.


예언자가 믿지 않았던 예언
그런데 종말이 오기 한 달여 전,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사실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1992년 9월, 검찰이 이장림을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신도들의 재산을 헌납받아 가로챈 혐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지만, 정작 사람들의 말문을 막은 것은 그의 개인 자산을 조사하던 중 나온 서류 한 장이었습니다.
이장림은 만기가 1993년 5월 22일인 환매채(還買債)를 사들여 갖고 있었습니다.
이 날짜를 다시 봐야 합니다. 세상이 끝난다는 날은 1992년 10월 28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가진 채권의 만기는 그로부터 반년도 더 지난, 1993년 5월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10월 28일에 세상이 끝난다고 믿었다면, 1993년에 돈을 돌려받는 채권을 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 돈을 쓸 세상 자체가 없을 테니까요.
검찰이 이것을 사기의 결정적 증거로 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언을 판 사람은, 자기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말 이후를 위해 조용히 돈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신도들에게 재산을 다 바치라고 설교하던 바로 그 시기에 말입니다.
이 한 장의 서류는, 그날 밤 하늘을 올려다보던 수천 명의 얼굴 위로 던지는 가장 차가운 질문이었습니다. 당신들이 모든 것을 바친 그 예언을, 예언한 사람조차 믿지 않았다면 — 그 밤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날 밤
지도자는 이미 구치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지도자 없이도 굴러갔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흰 옷을 입고 모였습니다. 일명 '승천복'이라 불린 그 옷을 입고, 자정을 향해 찬송을 불렀습니다.
전국이 그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봤습니다. 그날 밤 늦은 뉴스는 마포의 그 골목을 실시간으로 비췄습니다. 온 나라가, 어쩌면 세계가, 자정을 함께 셌습니다.
11시 58분.
11시 59분.
자정.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들려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병든 몸도, 늙은 몸도, 어린아이의 몸도, 흰 옷을 입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자정을 넘긴 골목에는 신호등만 무심하게 색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건물 안의 반응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침묵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열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도자들에게 달려가 "계산이 틀린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부산의 한 지부에서는 몸싸움까지 벌어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지친 얼굴로,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갈 집이 남아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습니다.


아침이 왔다
10월 29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도시는 여느 때처럼 출근길로 움직였습니다. 신문 가판대에는 어제의 소동을 전하는 지면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흰 옷을 입었던 사람들에게, 그 평범한 아침은 세상 어느 아침보다 잔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학교도, 직장도, 재산도, 때로는 가족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미선교회는 곧 문을 닫았습니다. 11월 초 잠시 폐쇄되었다가, 남은 이들이 다시 모이기도 했지만, 조직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습니다. 지도부는 사과 광고를 냈습니다.
이장림은 재판을 받았습니다. 1992년 12월, 서울형사지방법원은 그에게 사기죄로 징역 2년을 선고했습니다. 항소심에서는 징역 1년과 함께 2만 6천 달러 몰수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검찰은 그가 신도 4명에게서만 6억 5천만 원을 갈취하고, 개인적으로 34억 원을 사용한 장부를 확보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형량은 이 사건의 진짜 피해를 다 담지 못합니다.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학생, 직장을 되찾지 못한 가장, 팔아넘긴 집을 되돌릴 수 없는 사람, 떠난 가족이 돌아오지 않은 사람 — 그들의 잃음은 어떤 판결로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은 한국 사회 전체에는 일종의 '백신'이 되었습니다. 1992년의 그 밤을 생생하게 지켜본 세대에게, '몇 년 몇 월 며칠에 세상이 끝난다'는 예언은 그 이후로 좀처럼 먹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말 자체가, 이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경고음이 되었으니까요.

왜 믿었을까 — 예언이 실패한 뒤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이것입니다. 자정이 지나고 아무 일도 없었을 때, 왜 어떤 이들은 그 자리에서 곧장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까요. 왜 어떤 이들은 오히려 "날짜 계산이 틀렸을 뿐"이라며 다음 예언을 찾아 나섰을까요.
여기에 대한 고전적인 답이 하나 있습니다. 1950년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리언 페스팅거는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어느 작은 종교 집단에 잠입해 관찰했습니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 예언한 날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상식적으로는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페스팅거가 관찰한 것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언이 빗나간 뒤, 가장 많은 것을 바친 신자일수록 오히려 믿음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기도가 세상을 구했다"거나 "신이 시험한 것"이라는 새로운 설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이 마음의 작동을 '인지부조화'라고 불렀고, 훗날 『예언이 실패할 때(When Prophecy Fails)』라는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이유는 잔인할 만큼 단순합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버리고, 전 재산을 바치고, 가족과 등진 사람에게 "그 예언은 틀렸다"를 받아들이는 일은, 자기 인생 전체가 어리석은 착각이었음을 인정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것을 마주하느니, 차라리 예언을 조금 수정해서라도 붙잡는 편이 견디기 쉬운 것입니다. 바친 것이 클수록, 진실을 마주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자신을 지키려다 스스로를 더 깊이 가두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92년이라는 시대
이 사건이 하필 1992년에 터진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그 무렵 한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 뿌리 없이 살았고, 경제는 성장했지만 그 성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불안도 함께 커졌습니다. 밖으로는 냉전이 막 끝나고, 안으로는 세기말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0세기가 저물어 가던 이 시기, 세계 곳곳에서 '밀레니엄 불안'이라 부를 만한 종말의 정서가 떠돌았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는 사람에게 두 가지를 줍니다. 기회, 그리고 불안입니다. 그리고 뿌리를 잃고 불안한 사람에게, "너는 선택받았고, 곧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들려 올라간다"는 말은 무섭도록 달콤합니다. 서울대의 한 학자는 당시, 기성 교회가 지나치게 상류화·세속화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위로받을 자리를 잃은 것이 이런 운동에 사람들이 빨려든 배경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종말론은 언제나 시대의 불안을 먹고 자랍니다. 1992년의 한국은, 그 불안이 유난히 짙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세계의 형제 사건들
세상의 끝에 날짜를 매기고, 그 날짜가 그냥 지나가는 것을 함께 지켜본 일은 한국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가장 먼 조상은 19세기 미국에 있습니다. 1844년, 윌리엄 밀러라는 설교자가 그해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예언했고, 수만 명이 이를 믿고 재산을 정리한 채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들이 겪은 집단적 좌절은 '대실망(The Great Disappointment)'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1992년 마포의 골목과 1844년의 그 하루는, 백오십 년의 시간을 두고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혜성이 왔던 때도 있었습니다. 1997년 미국에서, 헤일밥 혜성이 밤하늘을 지날 무렵 '헤븐스 게이트'라는 집단은 그 혜성이 자신들을 데려갈 신호라 믿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집단적 비극으로 끝났고, 시한부 종말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끝으로 갈 수 있는지를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세기말에는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이름을 빌린 '1999년 종말설'이 지구를 한 바퀴 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1992년이 마지막은 아니었습니다. 1999년이 다가오자 비슷한 예언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2012년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마야 달력 종말설'이 잠시 사람들을 술렁이게 했습니다. 날짜는 매번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종말을 향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세상의 끝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늘 새로운 청중을 찾아냅니다.
한국의 종교 관련 사건들이 남긴 어두운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오대양 집단 변사 사건처럼 믿음과 공동체가 어떻게 파국으로 향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다른 밤들도 만나게 됩니다.


이 서랍을 닫기 전에
휴거는 없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자정, 하늘은 그대로였고, 아무도 들려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예언은 완전히, 아무 여지 없이 틀렸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진짜로 무너진 것들이 있었습니다.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학생의 일 년. 직장을 잃은 가장의 생계. 팔려 나간 집. 흩어진 가족.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선택받았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아침을 맞은 사람들의, 되돌릴 수 없는 마음. 이것들은 예언과 달리, 조금도 허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뿌리를 잃고 불안한 시대에, "당신은 특별하고 곧 구원받는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위험하게 다정할 수 있다는 것 — 그 마음의 문이 나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날 밤 자정을 넘긴 골목에는 신호등만 색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침이 왔을 뿐입니다. 세상의 끝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그저 계속되는 세상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없었습니다.
휴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잃은 것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짜로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