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어서는 안 되는 시가 있다고 한다. 종이 위에 잉크로 앉아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없지만, 그것이 사람의 목소리를 얻어 공기 중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낭독을 마친 사람은 목소리를 잃거나, 며칠 안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거나,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눕거나,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그 시의 이름은 '토미노의 지옥(トミノの地獄)'이다. 1919년 일본에서 세상에 나온,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 소년을 그린 짧은 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이 시 자체가 아니라, 이 시를 둘러싸고 백 년 가까이 자라난 하나의 금기다. 미리 말해 두자면, 그 저주에는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읽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이 이야기가 어째서 이토록 오래, 이토록 끈질기게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어 왔는지 — 그것이 오늘의 진짜 이야기다.

어느 시집에 잠들어 있던 시
토미노의 지옥은 인터넷의 어두운 구석에서 저절로 태어난 괴담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시이고, 실재하는 시인이 실재하는 시집에 남긴 작품이다. 시를 쓴 사람은 사이조 야소(西條八十, 1892~1970)다. 그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상징주의 시인이자, 훗날 수많은 유행가의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였고, 무엇보다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동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맑고 서정적인 노래를 짓던 바로 그 손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소년의 시를 함께 썼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어딘가 서늘한 데가 있다.
'토미노의 지옥'이 실린 시집의 이름은 '사금(砂金, Sakin)'이다. 사이조 야소가 1919년에 펴낸 그의 첫 시집이었다. 모래 속에 섞인 금이라는 뜻의 이 제목 아래, 여러 편의 서정시가 나란히 놓였고 그 사이에 이 음산한 작품이 조용히 끼어 있었다.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시는 어떤 저주의 소문도 거느리지 않았다. 그저 한 젊은 시인이 지어낸, 조금 어둡고 슬픈 시였을 뿐이다. 아무도 이 시를 소리 내어 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 시 때문에 누가 다쳤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저주는 시보다 한참 뒤에, 전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자. 이 글에서 우리는 시의 전문을 그대로 옮겨 싣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위험해서가 아니라 —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뒤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 이 글이 다루려는 것이 시의 낭독이 아니라 '읽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가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는지, 그 분위기의 윤곽만은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시가 그리는 어둠
'토미노의 지옥'은 토미노라는 이름의 소년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여정을 그린다. 시의 화자는 어딘가 자장가 같기도 하고, 어딘가 저주 같기도 한 기묘한 리듬으로, 이미 지옥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소년을 부른다. 누이가 피를 토하고, 홀로 남겨진 소년이 캄캄한 아래로,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심상이 시 전체에 걸쳐 이어진다. 밝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구원의 손길도, 돌아올 길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끝없이 아래로 향하는 낙하, 그리고 그 낙하를 지켜보며 소년의 이름을 되뇌는 목소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 시가 유난히 오싹하게 다가오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어린아이라는 소재다. 동요 시인의 손에서 나온 이 시는 형식적으로는 아이를 위한 노래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 그 안에 결코 아이에게 들려줄 수 없는 어둠을 감추고 있다. 부드러운 운율과 잔혹한 내용의 그 어긋남이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긁는다. 또 하나는 반복이다. 시는 특정한 후렴을 되풀이하며, 마치 주문을 외듯 같은 소리를 여러 번 굴린다. 소리 내어 읽으면 그 반복은 자연히 리듬이 되고, 리듬은 어느새 낭독하는 사람의 입을 무언가에 홀린 듯 움직이게 만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훗날의 저주 이야기가 자라날 토양이 마련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시의 내용과 분위기'일 뿐이다. 시가 음산하다는 것과, 그 시를 읽으면 실제로 흉사가 닥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세상에는 음산하고 슬픈 시가 수없이 많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낭독자에게 물리적인 재앙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독 이 시에만 '읽으면 안 된다'는 낙인이 찍혔을까.

저주는 언제 태어났는가
이 시가 '저주받은 시'라는 옷을 입게 된 것은 시가 발표된 1919년으로부터 무려 8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사이조 야소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70년이니, 정작 시를 쓴 시인은 자신의 시가 훗날 그런 소문을 거느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저주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 인터넷이 사람들의 일상 깊숙이 들어온 무렵이었다. 일본의 거대한 익명 게시판을 중심으로, 누군가가 이 오래된 시를 다시 꺼내 들고 하나의 무서운 규칙을 덧붙였다.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지 마라. 읽으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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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곁에 홀로 놓인 낡은 시집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짧은 영상 — 실제 기록 영상이 아니라 분위기를 재현한 연출이다.
이야기는 익명 게시판의 속성을 타고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누군가는 "친구가 재미 삼아 소리 내어 읽었더니 며칠 뒤 계단에서 굴러 크게 다쳤다"고 적었고, 또 누군가는 "낭독을 끝낸 사람이 갑자기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낭독 뒤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는 이야기, 며칠 만에 급사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붙으면서, 시는 점점 더 위험한 물건이 되어 갔다. 이런 이야기의 무서운 점은, 아무도 그 '친구'나 '아는 사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언제나 재앙은 글쓴이 자신이 아니라 한 다리 건넌 누군가에게 일어나고, 그래서 반박도 확인도 불가능한 채로 이야기는 자꾸만 굴러간다.
주목할 것은, 저주가 덧붙여지자 시의 원래 내용마저 새롭게 읽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소년, 되풀이되는 주문 같은 후렴, 동요의 형식을 뒤집어쓴 어둠 — 원래 시가 지니고 있던 이 음산한 요소들이, 이제는 '저주의 증거'처럼 해석되었다. 사실 순서는 정반대였다. 시가 음산했기 때문에 저주 이야기가 붙기 좋았던 것이지, 저주가 있었기 때문에 시가 음산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번 저주라는 렌즈를 끼고 나면, 시의 모든 행이 불길한 신호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금기 서사가 사람의 눈을 홀리는 방식이다.

저주에 근거가 없다는 것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토미노의 지옥에 얽힌 저주는, 도시전설이다. 실제로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고 해서 흉사가 닥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시는 백 년이 넘도록 수많은 도서관과 서점의 서가에 꽂혀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읽고 연구하고 인용해 왔다. 저주가 정말로 작동하는 것이었다면, 이 시를 다룬 국문학자와 편집자와 낭독자 들에게 재앙이 줄을 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시는 오늘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소개되어 있고, 인터넷에는 이 시를 실제로 소리 내어 낭독한 무수한 영상과 음성이 올라와 있다. 호기심에 이끌린 수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 앞에서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또박또박 읽어 내렸다. 만약 저주가 조금이라도 실재했다면, 그 많은 낭독자들 사이에서 통계적으로 뚜렷한 불행의 흔적이 남았어야 한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사람, 목소리를 잃은 사람, 급사한 사람이 남들보다 유독 많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패턴은 어디에도 없다. 재앙은 언제나 '이야기 속의 누군가'에게만 일어날 뿐, 실제로 검증 가능한 형태로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계단에서의 낙상, 갑작스러운 목소리 상실, 원인 모를 병 — 이것들은 사실 이 시를 읽든 읽지 않든 세상 어디서나 늘 일어나는 일들이다. 사람은 원래 계단에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감기로 목이 쉬기도 하며, 갑작스럽게 병을 얻기도 한다. 그런 평범한 불운이 우연히 이 시를 읽은 뒤에 찾아왔을 때, 저주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은 그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 짓는다. '그 시를 읽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이것이 바로 인간이 무작위한 우연 속에서 없는 인과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고, 모든 저주 괴담이 살아남는 오래된 비결이다.

그럼에도 오싹한 이유
저주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 이야기는 시시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토미노의 지옥은 그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왜일까. 그 힘은 시의 초자연적인 위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읽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금기의 구조 그 자체에서 온다.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그쪽으로 기운다. 열지 말라는 상자, 들여다보지 말라는 방, 소리 내어 읽지 말라는 시 — 금지된 것은 언제나 유혹적이고, 그 유혹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순간의 긴장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주는 진짜 공포다.
게다가 이 금기는 참여형이다. 대부분의 괴담은 멀리 있는 남의 일이지만, 토미노의 지옥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직접 하나의 선택을 들이민다. 이 시를 찾아내서, 소리 내어 읽어 볼 것인가. 그 선택의 순간, 당신은 이야기의 바깥에 서 있는 구경꾼이 아니라 이야기의 한복판에 선 당사자가 된다. 저주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막상 어두운 밤 홀로 그 시를 소리 내어 읽으려 하면 목이 살짝 잠기고 마는 것 — 그 미묘한 망설임이야말로 이 백 년 된 이야기가 지금도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하자. 토미노의 지옥은 저주받은 시가 아니다. 그것은 1919년, 한 시인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소년을 그린 어둡고 슬픈 시일 뿐이다.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어도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계단은 여전히 안전하고, 목소리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늘 밤, 촛불 하나를 켜고 낡은 시집을 펼쳐 든 채 그 첫 행을 소리 내어 읽으려는 순간 목이 살짝 잠긴다면 —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백 년 동안 이 이야기를 지켜 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당신 안에서 잠시 되살아난 것뿐이다. 이 시는 오직 눈으로만 읽어야 한다고, 나직이 속삭이는 그 목소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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