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9월 22일 새벽, 남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외딴 바다 어딘가에서 하늘이 아주 짧게 두 번 번쩍였다. 그 빛을 본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이미 설계수명을 훌쩍 넘겨 궤도를 돌던 미국의 노후 첩보위성 벨라 6911호였다. 위성에 실린 '방험계(bhangmeter)'라 불리는 광센서는 아주 밝은 첫 섬광이 번쩍인 뒤 곧이어 조금 약한 두 번째 섬광이 이어지는, 특유의 이중 섬광 곡선을 기록했다. 이 신호는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벨라 위성이 존재하는 목적 그 자체, 즉 대기 중 핵폭발을 탐지하기 위해 20년 가까이 지켜보아 온 바로 그 지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누가 그 바다 위에서 핵을 터뜨렸는지 — 혹은 정말 핵이 터진 것이 맞기는 한지 — 는 끝내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은 냉전이 기밀문서 속에 봉인해 둔 채 아직도 열어 주지 않는 이야기, '벨라 사건'이다.

벨라 위성 — 핵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눈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먼저 벨라라는 위성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벨라(Vela)는 1963년 미국·영국·소련이 대기권과 우주, 수중에서의 핵실험을 금지하기로 한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PTBT)이 체결된 직후 미국이 쏘아 올린 감시위성이다. 조약을 맺었다고 해서 상대가 몰래 핵을 터뜨리지 않으리라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지구를 내려다보며 대기 중 핵폭발 특유의 섬광과 방사선을 감시하는 '눈'을 궤도에 띄웠다. 이름부터가 스페인어로 '지켜본다(velar)'는 뜻에서 왔다.
벨라 위성의 핵심 장비는 '방험계'라는 광센서였다. 핵폭발은 다른 어떤 자연·인공 현상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빛의 패턴을 낸다. 폭발 직후 극히 밝은 첫 섬광이 번쩍 터진 뒤, 팽창하는 불덩이가 잠시 스스로를 가리며 빛이 약해졌다가, 다시 불덩이가 커지면서 두 번째로 밝아지는 것이다. 이 '밝음 → 어두워짐 → 다시 밝아짐'의 이중 섬광 곡선은 핵무기만이 그리는 지문과 같았다. 벨라 6911호는 이 곡선을 잡아내기 위해 만들어졌고, 실제로 그전까지 여러 차례 실제 핵실험을 정확히 탐지해 낸 검증된 기계였다. 1979년 그날, 이 노련한 눈이 남반구의 외딴 바다 위에서 바로 그 곡선을 그려 냈다.

아무것도 없는 남쪽 바다
문제를 더 기묘하게 만든 것은 그 섬광이 포착된 위치였다. 벨라 6911호가 가리킨 곳은 남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아프리카 남단과 남극 사이의 광막한 바다였다. 부베섬 인근, 프린스에드워드 제도가 흩어져 있는 이 해역은 지구상에서 사람의 눈이 가장 닿지 않는 곳 가운데 하나다. 지나는 배도, 사는 사람도 거의 없고, 가까운 육지라 해도 아무도 살지 않는 얼어붙은 무인도뿐이다. 누군가 세상의 이목을 완전히 피해 무언가를 터뜨리고 싶었다면, 지구상에서 이보다 나은 무대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사건을 단순한 관측 오류로 넘길 수 없게 만들었다. 만약 정말로 핵실험이었다면, 그것은 세계 어느 나라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바다 위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실험이라는 뜻이 된다. 텅 빈 남쪽 바다는 답이 아니라 더 무거운 질문이었다. 그토록 외진 곳을 골랐다는 사실 자체가,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어 했다는 방증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유력한 용의자 —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핵을 터뜨릴 능력과 동기가 함께 있는 나라를 좁혀 나가자, 곧 두 이름이 떠올랐다.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체제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있었고, 은밀히 핵무기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역시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지만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널리 여겨지던 나라였다. 그리고 두 나라는 국제적 제재 속에서 군사·기술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이스라엘·남아공 비밀 합동 핵실험'설이다.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남쪽 바다 위에서 핵탄두를 시험 삼아 터뜨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훗날 여러 정보 관계자와 연구자들은 이 설을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꼽았다. 특히 남아공 해군 함정이 그 무렵 문제의 해역 부근에서 움직였다는 정황, 그리고 이스라엘이 소형 핵무기의 성능을 검증할 이유가 있었다는 분석이 이 추론을 뒷받침했다. 다만 두 나라 모두 오늘날까지도 이를 공식적으로 시인한 적은 없다. 유력하되 확증되지 않은, 딱 그만큼의 무게로 이 설은 남아 있다.

카터 행정부의 모호한 판정
섬광이 포착되자 미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만약 이것이 진짜 핵실험이라면, 그것도 미국의 우방이 연루된 실험이라면, 이는 외교적으로 대단히 곤란한 사안이었다. 특히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핵확산 방지를 자신의 대외정책 핵심 가치로 내걸고 있었고, 재선을 앞둔 미묘한 시점이었다. 우방이 몰래 핵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미국은 그들을 제재해야 할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백악관은 저명한 과학자들로 특별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위원회는 벨라 위성의 신호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이 이중 섬광이 핵폭발이 아니라 위성에 우주의 미소운석 파편 같은 것이 부딪히면서 생긴 오작동 신호일 '가능성이 있다'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판정은 처음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벨라 위성이 그전까지 수차례 정확히 탐지해 낸 검증된 기계였다는 점, 그리고 뉴질랜드의 관측소가 그 무렵 남쪽에서 온 이상 음파를 기록했고 오스트레일리아 인근에서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된 정황 등, 핵실험을 가리키는 물증들이 위원회의 결론과 어긋났기 때문이다. 여러 정보기관 내부에서도 위원회의 '핵실험이 아닐 수 있다'는 판정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판정은 사건을 닫는 대신, 정부가 무언가를 덮으려 한 것 아니냐는 새로운 의혹을 열어 놓았다.

지금도 열리지 않는 문서들
이 사건이 반세기가 넘도록 미제로 남은 데에는 결정적 이유가 있다. 관련 문서 상당수가 여전히 기밀로 봉인돼 있거나, 공개된 것조차 핵심 부분이 검게 칠해진 채 나왔다는 점이다. 세월이 흐르며 미국의 여러 문서가 기밀 해제됐고, 그중 일부에서는 당시 정부 내부에서도 이 섬광을 실제 핵실험으로 판단한 정보 분석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판단의 근거가 되는 원자료, 관련국들의 움직임을 담은 첩보, 위성 신호의 세부 데이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았다.
기밀 해제된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겉으로 내놓은 공식 결론과 정부 안쪽에서 오간 실제 판단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남쪽 바다 위의 그 섬광은 단순한 위성 오작동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황이 핵실험을 가리켰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데 따르는 외교적 대가는 너무 컸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은 문서고 깊숙한 곳에 봉인된 채 남았다. 그리고 봉인된 문서란 언제나, 답을 주는 대신 상상을 부르는 법이다.

남는 미스터리
그날 새벽 남대서양 상공에서 노후한 위성이 잡아낸 두 번의 섬광 위에는, 지금도 확실한 답 대신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겹쳐 있다. 벨라 6911호는 핵폭발의 지문이라 불리는 이중 섬광을 정확히 그려 냈다. 그 빛이 번쩍인 곳은 지구에서 가장 외진 바다였고, 그 시각 그 부근에는 핵실험을 감행할 능력과 동기를 가진 나라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후 여러 물증이 핵실험을 가리켰지만, 카터 행정부의 조사위원회는 '핵실험이 아닐 수도 있다'는 모호한 판정을 내렸고, 핵심 문서들은 지금도 검게 칠해진 채 문서고에 잠들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1979년 9월 22일, 벨라 위성이 핵폭발과 똑같이 생긴 신호를 포착했고, 미국 정부는 끝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것이 정말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비밀 핵실험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위성의 우연한 오작동이었는지 — 진실은 텅 빈 남쪽 바다와 검게 칠해진 문서 사이 어딘가에 여전히 봉인돼 있다. 냉전이 남긴 하늘의 섬광 하나가, 반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