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을 따라 차를 몬다. 대게잡이 배가 드나드는 영덕을 지나, 한적한 해안도로 어느 구간에 이르면 예전엔 반드시 이 건물을 지나쳤을 것이다. 아스팔트에서 조금 물러앉은 나지막한 평지붕 콘크리트 건물. 창문은 사라졌고, 벽은 습기로 검게 얼룩진 채 낙서로 뒤덮여 있었으며, 무성한 잡초가 현관 계단을 삼키고 있었다. 근 이십 년 가까이, 사람들은 이 폐가를 하나의 음산한 이름으로 불렀다. 폐업한 곤지암 정신병원과 나란히 입에 오르내리던, 대한민국 '3대 흉가' 중 하나. 그중에서도 이곳에 달라붙은 이야기는 가장 어두웠다. 건물 아래 땅이 전쟁의 무덤이라고 했다. 잊혀진 1950년 어느 전투에서 스러진 원혼들이 밤이면 그 방들을 떠돈다고 했다. 언젠가 굿을 하러 들어간 무속인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온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다음 날 아침 예전 같지 않았다고들 했다. 영덕 흉가 이야기다. 그리고 그 해안의 안개가 오랫동안 감춰 온, 훨씬 더 조용한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해안도로변의 그 집
왜 하필 이 폐가가 전설이 되었는지 이해하려면, 이 건물이 서 있는 자리에 직접 서 봐야 한다. 이 건물은 한반도 동쪽 해안, 경상북도 영덕군에 자리한다. 자갈 해변과 소나무 우거진 곶(串), 그리고 잿빛으로 쉼 없이 뒤척이는 동해 바다의 고장이다. 잊혀진 산골짜기 깊숙한 곳이 아니다. 도로 바로 옆, 훤히 보이는 자리, 차를 몰고 무심코 속도를 내며 지나치는 그런 자리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묘하게도, 이곳을 더 섬뜩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없는 오지의 흉가는 피해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평범한 오후에 차로 지나치는 흉가, 가드레일 너머로 바다 안개가 밀려드는데 그 텅 빈 검은 창문들이 지나가는 차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흉가 — 그런 것은 집까지 따라온다.
인터넷이 이곳을 발견했을 무렵, 이 건물은 괴담이 요구할 법한 공포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문은 없어졌다. 창틀은 뜯겨 나갔다. 페인트는 벗겨져 얼룩진 맨 콘크리트가 드러났고, 언젠가 누군가가 내부 벽을 온통 낙서로 뒤덮어 놓았다. 이름들, 날짜들, 조악한 그림들, 서로에게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라며 부추기던 방문객들의 필사적인 허세. 안에는 텅 빈 방들과 무너져 가는 천장, 그리고 소금기와 썩은 냄새가 있었다. 인터넷에 떠돌던 모든 사진 속에서, 이곳은 정확히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장소처럼 보였다. 문제는 —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 '그렇게 보이는 것'과 '실제로 그런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이다.

전설: 학도병과 묻혀 버린 전장
가장 강력한 괴담은 실제 역사에서 그 무게를 빌려 온다. 영덕 흉가 전설도 6·25전쟁의 가장 가슴 아픈 한 장을 빌려 왔다. 온라인에서 이야기가 돌고 또 돌면서, 이 흉가는 학도병들의 피가 스민 땅 위에 지어진 것이 되었다. 전투에서 스러진 십 대의 지원병들,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채, 이제 호기심에 찾아온 방문객들이 서 있는 바로 그 바닥 아래 묻혀 잊힌 소년들. 이 집을 이 집으로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의 편치 못한 넋이라고, 이야기는 말했다. 서늘한 냉기. 목소리. 텅 빈 방을 가로지르는 그림자. 자기 삶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끝난 전쟁의 죽은 자들이, 그 외로운 해안에서 여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전설이 기대고 있던 그 역사는 실재했고,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1950년 9월, 영덕의 장사 해변 — 바로 이 해안 — 에서 6·25전쟁의 가장 처절한 작전 가운데 하나가 벌어졌다. 오늘날 장사상륙작전, 혹은 장사리 상륙작전으로 불리는 그 전투다. 앞으로 보게 되듯, 그 전투의 사실 자체에는 다툼의 여지가 없다. 다투어지는 것은, 그 사실이 조금 떨어진 곳의 폐횟집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럼에도 두 가지가 대중의 상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로 녹아붙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전쟁은 실재했다. 죽은 이들도 실재했다. 그 슬픔도 실재했다. 그리고 같은 해안선 위에 서 있는 어둡고 텅 빈 건물은, 물려받은 그 모든 비애를 부어 넣기에 더없이 자연스러운 그릇이었다.

1950년 장사 해변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
여기서는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풀어 놓을 만하다. 괴담의 소품이 되기에는 너무나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4일 — 서쪽 멀리에서 훨씬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 — 문산호(文山號)라는 상륙정 한 척이 영덕 장사 해변 앞바다에 좌초했다. 배에는 772명의 지원병이 타고 있었고, 그 절대다수가 학도병, 상당수는 아직 십 대였으며, 대개는 며칠간의 급조된 훈련만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양동작전이었다. 북한군의 시선을 동해안으로 끌어당겨, 다음 날 아침 맥아더 장군의 주력 상륙이 벌어질 인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그 상륙은 용기로 빚어낸 참극이었다. 폭풍이 배를 해변에 못 미친 모래톱에 걸리게 했고, 어린 지원병들은 빗발치는 총탄 아래 뭍으로 올라야 했다. 누군가는 헤엄쳐서, 누군가는 물가 소나무에 묶인 밧줄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그들은 훨씬 잘 무장한 적을 상대로 엿새를 싸웠고, 보급로를 끊고, 버텨 냈다. 그 싸움이 끝났을 때 139명이 전사했고, 훨씬 많은 이가 부상당하거나, 배가 그들을 데리러 돌아오지 못해 해변에 발이 묶인 채 남겨졌다. 그들의 희생은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사실은 거의 잊혔다. 지켜 주고자 했던 그 작전에 가려진 각주처럼. 오늘날 장사 해변 근처에는 이들을 기리는 전승기념관이 서 있다.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한다. 이들은 실제 젊은이들이었고, 실제로 죽었으며, 인터넷 공포담의 보이지 않는 배역이 아니라 영웅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폐가 뒤에 숨은 진실
그렇다면 전사한 학도병을 기리는 위령의 역사가 어떻게 '이름 없는 그들의 무덤 위에 지어진 집'이 되었을까. 영덕 주민들과, 실제로 찾아가 눈으로 확인한 기자들에 따르면, 그 답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애초에 그 둘은 연결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전쟁터였던 적도, 집단 매장지였던 적도, 그 비슷한 무엇이었던 적도 없다. 그저 횟집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예전에 '우석가든'쯤으로 불리던 곳으로 기억한다. 동해안 전체에 늘어선 흔한 도로변 횟집 가운데 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지나는 길손에게 회 한 접시와 시원한 소주를 내던 집.
폐가로 스러져 간 과정에도 초자연적인 구석은 전혀 없다. 주인은 — 성씨만 어렴풋이 기억되는 남자 — 수십 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그저 건물을 그대로 두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팔지도, 헐지도, 돌볼 사람을 두지도 않은 채. 그렇게 번잡한 도로 옆에 텅 빈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해안도로변에 버려진 건물은 오래 품위를 지키지 못한다. 도둑들이 문짝과 창틀을 뜯어 내다 팔았다. 소금 바람과 비가 페인트를 벗기고 콘크리트를 얼룩지게 했다. 잡초가 마당을 차지했다. 지나던 청소년들과 호기심 많은 이들이 벽을 낙서로 뒤덮었다. 하나하나 짚어 보면, 이곳을 공포의 집처럼 보이게 한 바로 그 디테일들 — 사라진 문, 검게 얼룩진 벽, 휘갈긴 이름들, 그 황량함 — 은 모두 평범하고 인간적인 설명으로 귀결된다. 1970년대 후반 이 지역에서 태어난 한 주민은, 자기 기억이 닿는 가장 먼 시절부터 그곳이 이미 방치된 흉물이었다고 회상했다. 학살은 없었다. 오직 방치와, 세월과, 바다가 있었을 뿐이다.

무속인, 방송, 그리고 공포가 만들어진 방식
사실이 이토록 평범하다면, 그 공포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 솔직한 답은, 그 상당 부분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 있다 — 귀신이 아니라, 미디어와 인터넷에 의해서. 2014년 무렵, 영덕 폐가는 폭발적으로 퍼진 '대한민국 3대 흉가' 목록에 편입되었다. 문 닫은 곤지암 정신병원, 그리고 제천의 한 폐업 식당과 나란히. 이 딱지는 스스로를 강화했다. 셋이 함께 등장할수록 이 신화 전체가 더 공식적인 것처럼 보였고, 영덕 건물의 사진은 갈수록 더 자극적인 설명이 붙은 채 게시판을 떠돌았다.
유명한 장면들 — 공포에 질려 집을 뛰쳐나온 무속인, '흉가 방송'에 찍혔다는 귀신, 다녀온 뒤로 예전 같지 않았다는 방문객 — 은 모두 이 부풀리기의 시대에 속한다. 밤샘 귀신 탐험 영상과 심야 방송은 바로 이런 폐가를 먹고 산다. 그리고 낙서로 뒤덮인 폐횟집은 완벽한 재료다. 분위기 있고, 공짜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자리에서 반박하기란 불가능하니까. 한국의 탐사 프로그램과 기자들은 결국 세 곳의 '대형 흉가' 모두에 같은 회의의 눈길을 돌렸고, 무뚝뚝한 결론에 이르렀다. 한 보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 이야기들은 사실상 조작이라는 것 — 인터넷 문화가 부풀리고 카메라를 위해 각색한 도시전설일 뿐, 확인된 죽음도, 전쟁의 무덤도, 그 오싹함 아래 실체라 할 것도 없다는 결론이었다. 영덕 흉가는 결국, 가장 시시한 이유로 무서운 곳이었다. 텅 비어 있었고, 흉했으며, 충분히 많은 사람이 여기 귀신이 나온다고 말했기에 모두가 그 말을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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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창문에 바다 안개가 밀려드는 가운데, 폐횟집의 텅 빈 방들을 천천히 미끄러지듯 훑는 장면 — 특정 장소의 실제 영상이 아니라 분위기를 재현한 것이다.
해안에 남은 것
영덕 흉가에는 묘한 교훈이 있다. 귀신에 관한 안심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슬픔과 방치가 얼마나 쉽게 공포로 치장되는지, 그리고 진짜 비극이 얼마나 조용히 도둑맞아 가짜 비극에 무게를 실어 주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 폐횟집 어딘가에는 772명의 어린 지원병에 대한 기억이 아직 어려 있다. 빗발치는 총탄 아래 헤엄쳐 뭍에 오르고, 멀리서 벌어질 상륙이 성공하도록 엿새 동안 해변을 지켜 낸 소년들, 그중 139명은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이야기 속의 귀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진짜처럼 느끼게 만든 이유였다. 아무 상관도 없는 건물을 떠돌게끔, 허락도 없이 빌려진 채로.
건물 자체의 결말은 거의 어울리게도 맥없다. 2015년 여름, 소유주가 마침내 이곳을 헐 뜻을 밝혔다는 보도가 나왔다. 낯선 이들이 공포의 성소로 바꿔 놓은 그 흉물을 지우겠다는 것이었다. 철거반이 정말 다 왔다 갔는지는 그 자체로 작은 미스터리다. 꽤 오랫동안 그 건물은 잡초까지 그대로 인 채 그냥 서 있었다. 늘 그래 왔던 만큼이나 평범하고, 그만큼이나 쓸쓸하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영덕 흉가의 가장 진짜 귀신인지도 모른다. 군인도, 무속인의 공포도 아닌, 그저 평범하고 텅 빈 방 하나 — 정작 들려줄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진짜 이야기가 저 아래 해변에서 이미 끝난 지 오래인 뒤에도, 온 나라가 함께 무서워하기로 한 그 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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