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 대곡천이 크게 굽이도는 곳에 나지막한 절벽이 하나 서 있다. 물빛이 낮아지는 갈수기의 며칠, 강물이 발치까지 빠져나가면 이 절벽의 한쪽 면 — 높이 약 3미터, 너비 10미터 남짓한 매끈한 바위 벽 — 이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위에는, 도무지 이 시대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그림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작살에 꿰인 채 몸을 뒤트는 고래, 등에 새끼를 업고 물살을 가르는 어미 고래, 그물에 걸린 짐승, 활을 겨눈 사람, 울타리 안에 갇힌 동물 떼. 하나하나가 손톱만 한 것부터 사람 키만 한 것까지, 셋으로도 세기 어려운 300여 점의 형상이 이 좁은 바위 면 하나에 겹겹이 포개져 있다. 학자들은 이 그림들이 짧게는 3천여 년, 길게는 7천 년 전에 새겨진 것으로 본다. 그것은 곧, 인류가 남긴 고래사냥 그림 가운데 이보다 오래된 것이 지구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우리 곁에 있으면서도 반쯤 물에 잠겨 좀처럼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 신비의 이야기다.

안개 낀 강가 절벽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대곡천의 원경, 선사시대의 고요한 분위기 (AI 생성 이미지)
안개 낀 강가 절벽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대곡천의 원경, 선사시대의 고요한 분위기 (AI 생성 이미지)

우연히 드러난 7천 년

반구대 암각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70년 말, 한 대학 조사단이 이 일대의 불교 유적을 찾아 대곡천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이듬해인 1971년, 조사를 이끌던 미술사학자와 연구자들은 강가 절벽에서 뜻밖의 것을 마주한다. 물때가 낀 바위 면에, 무언가 규칙적인 선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끼와 물이끼를 걷어내자 그 선들은 이내 고래가 되고, 사슴이 되고, 사람이 되었다. 이 발견을 이끈 이는 훗날 반구대 인근의 또 다른 각석까지 세상에 드러낸 미술사학자였고, 그 과정에서 이 골짜기를 오래 지켜본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 결정적인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발견은 우연에 가까웠지만, 그 우연이 드러낸 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처음 조사에서만 300점이 넘는 형상이 확인됐고, 육지와 바다의 온갖 짐승이 한 바위 면 위에서 뒤섞여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바위는 곧 국가의 보물이 되었다. 1982년 지역 기념물로, 그리고 1995년에는 국보로 정식 지정되었다. 번호는 285. 이후 반세기 동안 이 절벽은 수많은 학자와 순례자를 불러 모았지만, 정작 그 앞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그림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물이, 늘 물이 문제였다.

강가 절벽의 매끈한 바위 면에 새겨진 추상적인 동물 선각들, 이끼 낀 회색 바위, 판독 불가한 원시적 문양 (AI 생성 이미지)
강가 절벽의 매끈한 바위 면에 새겨진 추상적인 동물 선각들, 이끼 낀 회색 바위, 판독 불가한 원시적 문양 (AI 생성 이미지)

절벽에 새겨진 바다

반구대 암각화가 세계의 다른 어떤 바위그림과도 구별되는 지점은, 이 그림이 '바다의 사냥'을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바위 면의 절반가량을 채운 것은 고래다. 그것도 그냥 고래의 윤곽이 아니다. 어떤 고래는 등에 물을 뿜는 분수공까지 표현되어 있고, 어떤 고래는 새끼를 등에 업은 어미의 모습이며, 또 어떤 고래는 몸통에 작살과 밧줄이 꿰여 끌려가는 순간으로 그려져 있다. 학자들은 여기서 참고래, 혹등고래, 향고래, 심지어 돌고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을 구분해 냈다. 선 몇 개로 종(種)을 알아볼 수 있게 새겼다는 것은, 이 그림을 남긴 사람들이 고래를 얼마나 가까이서, 얼마나 오래 보아 왔는지를 말해 준다.

고래만이 아니다. 배 한 척에 여러 사람이 나눠 탄 모습, 그 배가 고래에 밧줄로 이어진 장면, 부표처럼 보이는 물체가 달린 작살까지 — 이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을 담은 기록이다. 여러 명이 배를 타고 나가 큰 고래를 작살로 찌르고, 부표를 매달아 지치게 한 뒤 끌어올리는 조직적인 포경.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고래잡이의 원형이 이 절벽 위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보다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인류가 언제부터 바다의 가장 큰 짐승에게 도전했는가 — 그 물음에 대한 가장 이른 대답이, 다름 아닌 이 좁은 한국의 강가 바위에 남아 있다.

작살과 밧줄에 꿰인 고래, 새끼를 업은 어미 고래를 새긴 원시적 바위 선각, 회색 절벽 표면, 글자 없음 (AI 생성 이미지)
작살과 밧줄에 꿰인 고래, 새끼를 업은 어미 고래를 새긴 원시적 바위 선각, 회색 절벽 표면, 글자 없음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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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빠지며 서서히 드러나는 절벽의 암각화 — 실제 유적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 분위기를 재현한 영상이다.

육지의 짐승들, 그리고 사람

바다가 이 그림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뭍이다. 호랑이는 이 절벽 위에서 가장 뚜렷한 육지 짐승 가운데 하나다. 몸통에 촘촘한 줄무늬가 새겨진 호랑이, 함정에 빠진 듯 몸을 웅크린 호랑이, 그리고 새끼를 밴 듯 배 속에 또 다른 형상을 품은 호랑이까지 있다. 사슴과 멧돼지, 노루도 무리를 이루고, 개처럼 보이는 짐승은 사냥을 돕는 듯 짐승 떼를 몰아간다. 사람도 등장한다. 활을 겨눈 사냥꾼, 나팔 같은 것을 부는 사람, 두 팔을 벌려 춤추는 듯한 형상, 그리고 얼굴만 크게 새긴 가면 같은 그림.

이 짐승들과 사람들이 뒤섞인 방식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오래 들여다보면 하나의 세계관이 떠오른다. 배가 부른 짐승, 새끼를 업은 고래, 함정에 든 호랑이 — 이 그림들은 단지 '무엇을 사냥했는가'를 넘어, '무엇이 많이 잡히기를 바랐는가'를 새긴 것처럼 보인다. 많은 학자들이 이 바위 면을 일종의 성소(聖所), 곧 풍요와 사냥의 성공을 비는 의례의 장소로 해석하는 이유다. 새기는 데만도 오랜 세월이 걸렸을 이 그림들은,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같은 바위를 찾아와 앞선 그림 위에 자신의 기원을 겹쳐 새긴 흔적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절벽이 수천 년에 걸친 기도의 벽이 된 셈이다.

줄무늬 호랑이, 사슴 무리, 활을 든 사람을 새긴 선사시대 바위 선각, 겹겹이 포개진 추상 문양, 회색 바위 (AI 생성 이미지)
줄무늬 호랑이, 사슴 무리, 활을 든 사람을 새긴 선사시대 바위 선각, 겹겹이 포개진 추상 문양, 회색 바위 (AI 생성 이미지)

물에 잠긴 국보

그런데 이 귀한 절벽에는, 발견되던 순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문제가 하나 있다. 물이다.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대곡천 하류에는 1965년에 완공된 사연댐이 있다. 이 댐이 물을 가두면서,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면은 대부분의 시간을 물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댐 수위가 일정 높이에 이르면 그림의 아랫부분부터 잠기기 시작하고, 조금 더 차오르면 절벽 전체가 강물 아래로 사라진다. 계산해 보면 이 국보는 일 년 가운데 절반이 넘는 기간, 어떤 해에는 예닐곱 달을 물에 잠긴 채 지낸다.

물은 그저 그림을 가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물에 잠겼다 드러나기를 해마다 반복하는 동안, 바위는 얼고 녹기를 되풀이하며 조금씩 부스러지고 갈라진다. 물때가 끼고, 표면이 벗겨지고, 선각의 골이 메워진다. 전문가들은 이미 이 그림의 상당 부분이 이런 반복 침수로 훼손되었다고 본다. 7천 년을 견딘 그림이, 정작 발견된 뒤 반세기 만에 가장 빠르게 닳고 있는 것이다. 발견이 곧 위기의 시작이기도 했다는, 문화유산 세계에서 드물지 않은 역설이 이곳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강물에 절반쯤 잠긴 회색 절벽 바위, 수면에 비친 바위 그림자, 흐린 하늘, 고요하고 쓸쓸한 분위기 (AI 생성 이미지)
강물에 절반쯤 잠긴 회색 절벽 바위, 수면에 비친 바위 그림자, 흐린 하늘, 고요하고 쓸쓸한 분위기 (AI 생성 이미지)

물속에 더 있을까 — 남은 수수께끼들

반구대의 미스터리는 그림 자체에만 있지 않다. 물속에 아직 무엇이 더 있는지,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물이 빠졌을 때 드러나는 바위 면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 골짜기를 오래 지켜본 이들 사이에서는, 지금의 암각화 말고도 강물에 잠긴 다른 바위에 또 다른 그림이 있(었)다는 증언이 오래도록 전해져 왔다. 댐이 물을 채우기 전, 강가에 드러나 있던 다른 바위 면에서 비슷한 새김을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증언에 무게를 싣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지금은 물속에 잠겨 확인할 길이 없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직 세어 보지 못한 7천 년 전의 그림들을 강물 아래에 그대로 잠재우고 있는 셈이다.

만든 시기를 둘러싼 논쟁도 여전하다. 어떤 학자는 이 그림들을 신석기 시대, 곧 7천 년 안팎으로 거슬러 올려 보고, 어떤 학자는 청동기 시대, 곧 3천 년가량으로 내려 잡는다. 고래처럼 바다 짐승을 주로 새긴 부분과 육지 짐승·사람을 새긴 부분이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새김의 깊이, 겹쳐진 순서, 함께 나온 유물 — 여러 단서를 두고도 하나의 답으로 모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 절벽은 처음부터 한 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여러 세대가 이어 그린 '자라난 그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바위 위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잊힌 여러 세대의 목소리가 겹쳐 잠들어 있는 것이다.

물이 빠진 강바닥에 드러난 여러 바위 덩어리, 표면에 희미한 선각의 흔적, 이끼와 물자국, 해질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분위기, 사람 없음 (AI 생성 이미지)
물이 빠진 강바닥에 드러난 여러 바위 덩어리, 표면에 희미한 선각의 흔적, 이끼와 물자국, 해질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분위기, 사람 없음 (AI 생성 이미지)

절벽이 던지는 물음

2025년 여름, 반구대 암각화는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인류 전체가 함께 지켜야 할 유산으로 세계가 공인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로 그 여름에도 이 절벽은 한 달 넘게 강물 아래 잠겨 있었다. 세계가 지켜야 한다고 선언한 그림을, 정작 우리는 여전히 반쯤 물에 담가 둔 채로 두고 있었던 것이다. 댐의 수위를 낮추자니 도시의 식수가 걸리고, 그림을 지키자니 사람의 물이 걸린다. 7천 년 된 고래와 오늘의 수돗물 사이에서, 이 절벽은 반세기가 넘도록 답을 기다려 왔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아득한 옛날, 이름도 남기지 못한 어떤 사람들이 이 강가 절벽에 올라, 자신들이 쫓던 바다의 가장 큰 짐승을 바위에 새겼다. 그것은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의 기억이었고, 7천 년을 견뎌 우리에게까지 닿았다. 그들은 무엇을 빌며 이 단단한 바위에 고래를 새겼을까. 많이 잡히기를, 무사히 돌아오기를, 혹은 그저 잊히지 않기를 바랐을까. 대곡천의 절벽은 오늘도 물때에 맞춰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강물 아래로 조용히 몸을 감춘다. 그 짧은 얼굴 위에서, 7천 년 전의 고래는 여전히 작살에 꿰인 채 몸을 뒤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