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현금 3억 원이 사라졌다.
목격자들이 기억하는 것은 검은 복면과, 스치듯 본 흐릿한 인상뿐이었다. 그 인상으로 그려진 몽타주 한 장이 전국에 뿌려졌다. 십삼만 장이 넘었다. 그러나 범인은 그 종이 위에만 남은 채, 21년 동안 잡히지 않았다.


2001년 12월 21일, 둔산동의 아침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께. 대전 서구 둔산동의 한 국민은행 지하주차장이었다.
그날 아침, 은행의 현금수송 업무가 여느 때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현금이 든 가방이 옮겨지는 그 순간, 검은 복면을 쓴 남자 둘이 나타났다. 이들은 승용차로 앞을 막아섰고,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저항이 있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그 자리에 있던 은행 출납과장 김모(당시 45세) 씨가 권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범인들은 현금 3억 원이 든 가방을 들고 그대로 달아났다. 백주 대낮, 도심 한복판의 은행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국에서 총소리가 울린다는 것
이 사건이 특별했던 이유 하나는, 그것이 '총'을 사용한 강도였다는 점이다.
한국은 개인의 총기 소지가 엄격히 금지된 나라다. 수렵용 총기조차 경찰서에 보관했다가 허가를 받아 꺼내 써야 하고, 권총 같은 무기는 일반인이 합법적으로 가질 방법이 사실상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총으로 사람을 쏘는 강력범죄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강력사건은 흉기나 둔기에 의한 것이지, 총성이 울리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런 나라에서, 백주에 은행 앞에서 권총이 발사되고 사람이 죽었다. 사회가 받은 충격은 컸다. 그렇다면 범인들은 그 권총을 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수사 결과 드러난 사실은 더 서늘했다. 이들이 사용한 무기는, 사건이 있기 두 달여 전인 2001년 10월 경찰관에게서 빼앗은 38구경 권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범행 도구부터가 이미 또 하나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몽타주 한 장만 남았다
사건 직후 경찰은 대규모 수사본부를 꾸리고 공개수사에 나섰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이 너무 적었다. 범인들은 복면을 쓰고 있었고,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목격자들의 진술을 모아 얻어 낸 것은 "20~30대 남성"이라는 두루뭉술한 특징과, 그것을 바탕으로 그린 몽타주 한 장이 거의 전부였다.
경찰은 그 몽타주를 무려 십삼만 장 넘게 찍어 전국에 뿌렸다. 지하철역과 관공서, 거리 곳곳에 범인의 얼굴이 붙었다. 300건이 넘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범인에게 가닿지 못했다.
몽타주는 목격자의 흐릿한 기억을 손으로 옮긴 그림일 뿐이다. 그것이 실제 얼굴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사건은, 그 한 장의 그림 위에서 멈춰 버렸다.


수사본부가 문을 닫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서는 마르기 시작했다.
2002년 여름, 수사기관은 용의자로 지목된 이들을 붙잡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을 범인으로 묶어 둘 결정적 물증이 없었다. 결국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손에 잡힐 듯하던 실마리가 다시 미끄러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2003년 3월, 수사본부는 해체되었다. 대규모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사건은 공식적으로 장기미제의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범인은 세상 어딘가에서 멀쩡히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3억 원과, 사람을 죽인 비밀을 안은 채. 유가족에게는, 아버지를 잃고도 그 아버지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흘러간 세월, 그리고 다가온 시한
미제로 남은 사건에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공소시효였다.
공소시효란, 범죄가 벌어진 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더 이상 그 죄를 기소해 처벌할 수 없게 되는 제도다. 시간이 너무 흐르면 증거도 기억도 희미해지고, 언제까지나 소추의 불안 속에 두는 것도 온당치 않다는 취지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문제는 살인처럼 무거운 죄에도 이 시효가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법에 따르면,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2016년 무렵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때가 지나면, 설령 훗날 범인이 밝혀진다 해도 더 이상 처벌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범인이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저 숨어서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면 됐다. 시효라는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질 참이었다.

한 아이의 이름에서 시작된 법
그 닫히려던 문을, 한 법이 붙들었다.
2015년, 대한민국 국회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으로 형사소송법을 개정했다. 사람을 죽인 죄만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이 법에는 별명이 붙었다. '태완이법'이었다.
태완이는 1999년 대구에서 누군가가 뿌린 황산에 얼굴과 온몸을 크게 다치고 끝내 세상을 떠난 여섯 살 아이의 이름이다.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이 사건 역시 공소시효의 벽 앞에서 미제로 남았다. 그 아이의 죽음과, 시효 때문에 정의가 좌절되는 것을 지켜본 사회의 분노가, 결국 법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이 법 개정으로, 완성되지 않은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되살아났다. 2016년에 닫힐 예정이던 대전 은행 사건의 문도, 그렇게 다시 열린 채로 유지되었다. 범인이 시간만 기다리면 자유로워지던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태완이법 자체의 이야기는 별도의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는, 그 법이 없었다면 이 사건 또한 영영 묻힐 뻔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충분하다.)

낡은 유류품에 남아 있던 흔적
법이 시간을 붙들어 두는 사이, 과학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건 현장과 범행에 쓰인 차량에서, 경찰은 범인들이 남기고 간 물건 몇 가지를 확보해 두었다. 마스크와 손수건 같은 것들이었다. 사건 당시의 기술로는 그 유류품에서 범인을 특정할 만한 것을 뽑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증거는 버려지지 않고 보관되었다.
DNA 감식 기술은 해가 갈수록 정교해졌다. 아주 적은 양의 시료에서도 유전자 정보를 읽어 낼 수 있게 되었고, 예전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미세한 흔적에서도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2022년, 경찰은 보관해 두었던 그 낡은 마스크와 손수건을 다시 꺼내 재감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남성의 DNA를 검출해 냈다. 21년 전 그 아침, 범인이 남기고 간 아주 작은 흔적이 마침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담배꽁초 하나가 맞춘 마지막 조각
DNA를 손에 넣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유전자 정보는 대조할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사람을 가리킨다.
돌파구는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2015년, 충북 지역의 한 불법 게임장에서 경찰이 단속을 하며 수거해 둔 담배꽁초가 있었다. 거기서 나온 DNA가, 대전 은행 사건의 유류품에서 나온 DNA와 일치한 것이다.
시간도 장소도 전혀 다른 두 조각이, 유전자라는 하나의 열쇠로 맞물렸다. 그렇게 특정된 인물이 이정학이었다. 그리고 그의 진술을 따라, 공범인 이승만의 신병까지 확보되었다. 두 사람은 고교 동창 사이로, 크고 작은 절도를 이어 오다 은행 현금수송차량을 노렸던 것으로 조사됐다.
2022년 8월 25일. 사건이 벌어진 지 21년 만에, 몽타주 위에만 남아 있던 얼굴들이 마침내 세상 앞에 실체를 드러냈다.

다시 열린 법정
체포된 두 사람은 강도살인 혐의로 법정에 섰다.
재판의 쟁점 가운데 하나는, 둘 중 누가 방아쇠를 당겼느냐였다. 사람을 직접 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책임의 무게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주장은 이 대목에서 엇갈렸다.
법원은 여러 정황을 근거로 이승만이 총을 쏜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강도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함께 계획하고 실행한 공범인 이상, 그 책임 또한 무겁게 물어졌다.
1심과 항소심은 두 사람에게 모두 무거운 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2023년 12월 14일, 대법원은 이승만과 이정학에게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도 함께 명령되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 22년 만이었다.



무엇이 21년의 침묵을 깼는가
이 사건이 마침내 풀린 데에는, 어느 하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여러 힘이 겹쳐 있었다.
첫째는 법이었다. 태완이법이 없었다면, 사건의 공소시효는 2016년에 끝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2022년에 DNA가 일치했다 해도, 두 사람을 법정에 세울 길은 이미 닫혀 있었을 것이다. 바뀐 법 하나가, 정의가 도착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둘째는 과학이었다. 21년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낡은 마스크와 손수건이, 발전한 DNA 기술 앞에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연히 보관돼 있던 담배꽁초 하나가, 그 흔적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셋째는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유류품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둔 손, 미제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수사관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유가족이 있었다. 그 인내가 없었다면, 법과 과학이 아무리 준비되어 있었어도 사건은 서랍 속에 그대로 남았을 것이다.

정리하며
2001년 겨울, 대전 둔산동의 은행 지하주차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3억 원이 사라졌으며, 범인들은 몽타주 한 장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십삼만 장이 넘는 몽타주도, 300건이 넘는 제보도 그들을 잡지 못했다. 수사본부는 문을 닫았고, 공소시효라는 시한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사건은 영영 묻힐 뻔했다.
그러나 바뀐 법 하나가 시간을 붙들었고, 발전한 과학이 낡은 유류품에서 아주 작은 흔적을 읽어 냈으며, 우연히 남아 있던 담배꽁초 하나가 마지막 조각을 맞췄다. 총성과 3억, 그리고 21년의 침묵은 그렇게 깨졌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말한다. 어떤 진실은 아주 늦게 도착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도착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법이 시간을 붙들어 두고, 과학이 흔적을 읽어 내고, 사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