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범인은, 처음부터 그들이 아니었다.
물증은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고문으로 짜낸 자백뿐이었다. 두 남자는 하지도 않은 살인으로 21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자유를 되찾았을 때 그들의 청춘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진짜 범인은, 시간 뒤로 영영 숨었다.
이 글은 1990년 부산 낙동강변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살인사건 그 자체보다 그 뒤에 벌어진 일 — 국가가 무고한 두 사람을 어떻게 범인으로 만들었고, 그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어떻게 31년이 걸렸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1990년 초, 그 겨울의 강변
1990년 초, 부산 사상구 엄궁동 낙동강변. 도심을 벗어난 이 강가의 갈대밭은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 겨울의 어느 새벽, 차 안에서 데이트를 하던 남녀에게 두 명의 괴한이 들이닥쳤다.
여성은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되었고, 함께 있던 남성은 크게 다쳤다. 한적한 강변, 목격자 없는 어둠 속에서 벌어진 강도살인이었다. 피해 여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얼마나 큰 공포와 고통을 겪었는지 — 우리는 함부로 묘사하지 않겠다. 다만 한 사람의 삶이 그 밤에 부당하게 끝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1990년의 지방 강변에는 오늘날처럼 촘촘한 감시 카메라가 없었다. 목격자도, 결정적 물증도 부족했다. 경찰이 손에 쥔 것은 시신과 다친 생존자, 그리고 어둠뿐이었다. 사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미제로 남는 듯했다.
그러나 해결을 요구하는 압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압박은, 사건과는 아무 상관도 없던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엉뚱한 곳에서 걸려든 두 사람
사건이 일어나고 한참이 지난 뒤, 두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택시기사였던 최모씨와 그의 친구 장모씨. 두 사람이 낙동강변 살인사건과 관련해 처음부터 지목된 것은 아니었다. 알려진 바로는, 이들은 살인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사안으로 조사를 받던 중에 이 사건의 용의자로 둔갑했다.
수사기관이 왜 이들을 지목했는지, 그 연결 고리가 무엇이었는지는 지금 돌아봐도 납득하기 어렵다. 두 사람을 그 겨울 새벽의 강변과 직접 잇는 물증은 없었다. 그럼에도 최씨와 장씨는 순식간에 '낙동강변 2인조 살인범'이 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먼저 붙잡혔고, 공범을 대라는 추궁 속에서 친구의 이름이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살인의 굴레에 묶였다. 서로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서로의 이름이 불려 나온 것에 가까웠다.


고문으로 짜낸 자백
두 사람은 붙잡힌 순간부터 무죄를 확정받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같은 말을 했다. 자백은 고문으로 강요된 것이었다고.
훗날 재심 과정에서 조명된 정황에 따르면, 두 사람은 조사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감금된 채 가혹한 신문을 받았다. 구타가 있었고, 물을 이용한 고문이 있었으며, 거꾸로 매달리기와 잠을 재우지 않는 방식의 신문이 이어졌다고 이들은 진술했다. 며칠 밤을 잠들지 못한 채 폭력과 위협 앞에 놓인 사람에게, 결백을 지켜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문의 잔혹함을 전시하지 않겠다. 다만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사람이 극한의 고통과 공포 앞에서 하지도 않은 일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눈앞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순간만 넘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밝혀진 오판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무고한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자백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그리고 그 자백이 고문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증거가 아니라 폭력의 결과물일 뿐이다.

'자백'이라는 이름의 증거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사법 역사에서, 오판을 부르는 가장 위험한 증거는 뜻밖에도 '자백'이다.
자백은 강력하다. 본인이 스스로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것만큼 확실해 보이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강력함 때문에, 자백은 위험하다. 물증이 부족한 사건에서 수사가 자백에만 매달리면, 자백을 받아내는 것 자체가 수사의 목표가 되어 버린다. 진실을 찾는 대신, 이미 정해 놓은 결론에 사람을 끼워 맞추게 되는 것이다.
낙동강변 사건에는 두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할 만한 결정적 물증이 없었다. 현장에서 나온 증거가 이들을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수사를 떠받친 것은 오직 자백, 그것도 고문 끝에 나온 자백이었다. 물증이 없는 자리를 폭력이 대신 채운 셈이다.
1980~90년대 한국의 일부 강압수사는 이런 방식으로 흘러갔다. 먼저 범인을 정해 놓고, 그 사람의 입에서 "내가 했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자백은 법정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었고, 그 뒤에 아무리 진실을 외쳐도 좀처럼 되돌려지지 않았다.

무기징역, 그리고 21년
재판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법정에서 범행을 부인했다. 자백은 고문으로 강요된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물증 없이 자백만으로 이어진 재판에서, 그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내려진 형은 무기징역이었다.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감옥에서 생을 마칠 수도 있는 형벌. 그리고 그 형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 재판의 항소심에서 두 사람의 변호를 맡은 이들 가운데는,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당시의 한 인권 변호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압수사와 고문의 정황을 지적하며 무죄를 다투었지만, 그 시절의 법정은 자백의 벽을 넘지 못했다. 진실이 이기기에는, 시대가 아직 너무 일렀다.
그렇게 두 남자는 하지도 않은 살인으로 감옥에 갇혔다. 서른 언저리의 젊은 나이에 무기수가 되어, 21년이라는 긴 세월을 철창 안에서 보냈다. 그들이 2013년경 가석방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청춘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감옥에 들어갈 때 젊은이였던 두 사람은, 나올 때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 있었다.


잃어버린 21년
21년이라는 시간을 헤아려 보자.
감옥에 갇힌 사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삐삐가 사라지고 휴대전화가 손에 들어왔으며, 거리의 풍경도 사람들의 말투도 바뀌었다. 그 모든 변화의 바깥에서, 두 사람은 시간이 멈춘 방 안에 갇혀 있었다.
무기수에게는 형기의 끝이 없다.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나갈 수는 있을지조차 기약이 없는 채로 하루하루를 견뎌야 한다. 하지도 않은 살인으로 그 시간을 견디는 심정을, 바깥의 우리는 온전히 헤아리기 어렵다.
가족의 삶도 함께 무너졌다. 살인범의 가족이라는 낙인은 부모와 형제에게도 그늘을 드리웠다. 한 사람의 억울한 유죄는, 그 한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는다.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의 삶으로 번져 나간다.
그리고 그 21년 동안, 진짜 범인은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사건의 가장 서늘한 대목이다. 무고한 두 사람이 대신 갇혀 있는 동안, 그 겨울 강변에서 실제로 죄를 저지른 사람은 처벌을 피한 채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재심 — 닫힌 문을 다시 두드리다
가석방으로 나온 뒤에도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잃어버린 21년을 그저 삼키고 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결백을 다시 증명하기 위해 '재심'이라는 마지막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재심이란, 이미 확정된 판결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고 판단될 때 그 사건을 다시 재판하는 제도다. 한 번 확정된 판결을 뒤집는 일이기에, 재심의 문턱은 대단히 높다. 새로운 증거가 있어야 하고, 기존 판결의 오류가 명백해야 한다. 무죄를 받는 것보다 재심 자체를 여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지난한 싸움에는 재심 사건을 전담해 온 변호인단이 함께했다. 물증 없이 자백만으로 이루어진 유죄, 고문으로 강요된 자백의 정황을 하나하나 다시 쌓아 올리는 긴 과정이었다.
전환점은 국가 스스로에게서 왔다. 검찰 과거사위원회 등이 과거의 강압수사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던 흐름 속에서, 2019년경 이 사건에 대해 "고문에 의해 사건이 조작됐다"는 취지의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사건을 만든 국가가, 그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인정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 결과는 재심의 문을 여는 결정적 힘이 되었다.


31년 만의 무죄
2021년 2월 4일, 부산고등법원은 재심에서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두 사람이 조사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감금되었고,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으며, 그렇게 나온 자백은 임의성이 없어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물증 없이 자백만으로 유죄를 인정했던 31년 전의 판결이, 마침내 뒤집힌 것이다. 검찰 역시 재심 과정에서 두 사람에 대해 무죄를 구형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이후 상고를 포기하면서 무죄는 그대로 확정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1990년으로부터 31년. 두 사람이 감옥에서 보낸 21년, 그리고 출소 후 다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 세월까지 모두 합친 시간이었다. 서른 언저리에 무기수가 된 두 남자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무죄'라는 두 글자를 손에 쥐었다.
무죄가 선고되던 날, 법정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 눈물이 되돌려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흘러간 21년도, 사라진 청춘도, 무너진 가족의 삶도.


국가의 사과,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의 값
무죄가 확정된 뒤, 경찰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경찰 수사에 대한 공식 사과가 나왔고, "깊이 반성한다"는 뜻이 전해졌다. 31년이 걸린 사과였다.
두 사람과 그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위법한 수사와 고문, 그리고 잘못된 유죄 판결로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고, 두 사람과 가족들에게 상당한 금액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관련 배상 규모가 수십억 원대에 이르렀으며, 법무부는 2022년 이 국가배상 소송의 항소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국가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더는 다투지 않겠다고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배상금도, 그 어떤 사과도, 하지도 않은 살인으로 잃어버린 21년을 되돌려 주지는 못한다. 돈으로 매긴 배상액은 국가가 잘못을 인정했다는 증표일 뿐이다. 잃어버린 시간에는 애초에 값을 매길 수 없다.


진짜 범인은, 시간 뒤로 숨었다
이 사건에는 끝내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하나 있다. 진짜 범인이다.
두 사람이 무죄를 확정받았다는 것은, 그 겨울 강변에서 실제로 죄를 저지른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진범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강도살인 혐의의 공소시효가 이미 지나 버렸기 때문이다.
공소시효란, 범죄가 일어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더는 그 범죄로 재판에 넘길 수 없게 하는 제도다. 설령 지금 진범을 특정한다 해도, 시효가 끝난 이 사건에서는 그를 법정에 세울 길이 사실상 막혀 있다. 무고한 두 사람이 대신 21년을 갇혀 있는 사이, 진짜 범인은 처벌의 시간표 바깥으로 유유히 빠져나간 것이다.
이것이 고문수사가 남긴 가장 잔인한 결과다.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드는 순간, 진짜 범인을 쫓을 시간과 기회는 함께 사라진다. 두 사람의 잃어버린 21년과, 끝내 처벌받지 않은 진범의 자유는 같은 사건의 앞뒷면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낙동강변 살인사건은 화성 8차 사건, 삼례 나라슈퍼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경찰 고문·조작 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나란히 거론된다. 이 사건들에는 하나의 공통된 문법이 있다. 먼저 범인을 정해 놓고, 물증 대신 자백을 앞세우고, 그 자백을 폭력으로 짜낸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무고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고, 진짜 범인은 밖에서 자유를 누리고,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낙동강변 사건에서 그 시간은 31년이었다.
이 사건은 사법 제도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물증보다 자백을 앞세운 수사, 사람을 향한 고문, 한 번 내린 결론을 되돌리기 어려워하는 관성 — 이 모든 것이 겹칠 때, 아무 죄 없는 사람이 무기수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의 끝에 남는 것이 있다. 잃어버린 21년을 안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재심의 문을 두드린 두 사람이 있었기에, 국가는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진실은 31년이나 늦게 왔지만,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진실의 뒷면에는, 끝내 잡히지 않은 진범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시간 뒤로 영영 숨었다. 그리고 그를 숨긴 것은, 다름 아닌 고문으로 짜낸 그 자백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