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경주 감포 앞바다에는 지금도 물속에 잠긴 하나의 무덤이 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왕이, 정말로 자신을 바닷속 바위에 묻게 한 자리다.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천삼백여 년 전, 이 바다 위로 작은 산 하나가 떠와 뭍을 향해 다가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산 위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자라 있었고,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이 되면 하나로 합쳐졌다고 한다. 그 대나무를 베어 만든 피리 하나가, 이후 신라가 가장 아끼는 국보가 되었다. 불면 온갖 근심과 재앙을 잠재운다 하여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했다. 만 가지 파도를 쉬게 하는 피리라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 피리가 어떻게 세상에 왔는가에 관한 것이자, 동시에 이 피리가 결국 어디로 사라졌는가에 관한 것이다.

안개 낀 동해 새벽, 잔잔한 바다 위로 희미하게 떠 있는 작은 섬의 실루엣 (AI 생성 이미지)
안개 낀 동해 새벽, 잔잔한 바다 위로 희미하게 떠 있는 작은 섬의 실루엣 (AI 생성 이미지)

바다에서 온 대나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신라 신문왕 2년, 서기 682년 5월 어느 날의 일이다. 신문왕은 바로 전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 가까운 곳에 절을 하나 지어 두었다.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문무왕은 살아생전,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 지내라 일렀다. 죽어 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가 쳐들어오는 것을 막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감은사의 금당 아래에는 용이 된 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바다로 통하는 물길까지 마련해 두었다고 전한다.

그러던 682년 5월 초하루, 바다를 지키던 관리가 급히 아뢰었다. 동해 앞바다에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그 산의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와 같았고, 그 위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대나무가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이 되면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는 점이었다. 왕이 직접 그 떠 있는 산에 배를 타고 나아갔다. 그러자 바다에서 한 마리 용이 검은 옥으로 만든 띠를 받들고 나타나, 왕을 맞이했다고 한다.

신비로운 달빛 아래, 물 위에 떠 있는 거북 머리 형상의 작은 바위섬과 그 위의 대나무 실루엣 (AI 생성 이미지)
신비로운 달빛 아래, 물 위에 떠 있는 거북 머리 형상의 작은 바위섬과 그 위의 대나무 실루엣 (AI 생성 이미지)

용이 전한 말

왕이 용에게 물었다. 이 산 위의 대나무가 갈라졌다 합쳐졌다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용의 대답은 이러했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고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대나무도 하나로 합쳐진 뒤에야 비로소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대나무를 가져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 했다. 그리고 용은 한 가지를 더 일러 주었다. 이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라,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마음을 합쳐 왕에게 보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두 이름이 나란히 등장하는 것에는 깊은 뜻이 있다. 문무왕은 삼국을 하나로 통일한 임금이었고, 김유신은 그 통일 전쟁을 이끈 최고의 장군이었다. 살아서 신라를 하나로 만든 두 사람이, 죽어서는 하나는 바다의 용이 되고 하나는 하늘의 신이 되어, 이제 막 아버지를 잃고 왕위에 오른 젊은 신문왕에게 나라를 다스릴 신표를 함께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그것도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라는 뜻을 담아서. 왕은 그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뭍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배가 뭍에 닿기도 전에, 그 떠 있던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져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두운 심해에서 은은한 빛과 함께 솟아오르는 용의 신화적 실루엣, 무섭지 않고 신비로운 분위기 (AI 생성 이미지)
어두운 심해에서 은은한 빛과 함께 솟아오르는 용의 신화적 실루엣, 무섭지 않고 신비로운 분위기 (AI 생성 이미지)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창고에 간직해 두었다. 그리고 이 피리를 불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고 《삼국유사》는 적는다. 쳐들어온 적의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고, 앓던 병이 씻은 듯이 나았으며, 가뭄이 들면 비가 내리고, 장마가 지면 하늘이 개었다고 한다. 거센 바람은 잦아들었고, 사나운 물결은 잔잔해졌다. 나라 안의 온갖 근심과 재앙이 이 피리 소리 앞에서 스러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피리를 '만파식적', 곧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 부르고, 나라의 보물로 삼아 소중히 간직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 둘 필요가 있다. 피리 하나가 정말로 적군을 물리치고 비를 부르고 병을 고쳤다고, 있는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신라 사람들이 무엇을 간절히 바랐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그들이 만파식적에 담아 낸 소원은 하나같이 '평안'이었다. 전쟁이 멎기를, 병이 낫기를, 때맞춰 비가 오고 바람이 자기를. 삼국을 통일한 직후의 신라는 겉으로는 강성했으나, 안으로는 여전히 불안했다. 옛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품어야 했고, 바다 건너에서는 언제 왜구가 쳐들어올지 몰랐다. 그런 시대에 '불기만 하면 모든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는 상징은, 이제 막 하나가 된 나라가 무엇보다 절실히 원하던 것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 낸 그릇이었던 셈이다.

안개 자욱한 바닷가 바위에 홀로 놓인 대나무 피리의 정밀한 클로즈업, 달빛에 젖은 신비로운 톤 (AI 생성 이미지)
안개 자욱한 바닷가 바위에 홀로 놓인 대나무 피리의 정밀한 클로즈업, 달빛에 젖은 신비로운 톤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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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새벽 동해와 감은사 터의 석탑을 천천히 비추는 짧은 영상 — 실제 기록 영상이 아니라 분위기를 재현한 연출이다.

피리는 어디로 사라졌나

여기까지가 만파식적이 세상에 온 이야기다. 그러나 이 피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 만능의 보물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신문왕의 뒤를 이은 효소왕 시대에, 이 만파식적이 한 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일을 전한다. 화랑 부례랑이 말갈족에게 붙잡혀 갔을 때, 창고에 있던 만파식적이 신비롭게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얼마 뒤 부례랑이 무사히 돌아오면서 피리도 되찾았는데, 이 신이한 일을 계기로 피리의 이름은 한 단계 더 높여져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 되었다고 한다. 파도를 잠재우는 힘이 갑절로 커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이 극적인 사건 이후, 만파식적은 신라의 정식 기록에서 서서히 흐릿해진다. 왕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 피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떤 상태인지를 또렷이 전하는 기록은 남지 않았다. 신라가 저물고 고려가 서고, 다시 조선이 들어서는 긴 세월 동안,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은 옛 신라의 신비를 이야기할 때에나 잠깐씩 불려 나올 뿐이었다. 나라의 국보였다는 그 피리의 실물은, 정작 어느 시점부터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훨씬 뒷날인 조선 시대에 경주 지방에서 오래된 옥피리 하나가 나타나 '혹시 이것이 그 잃어버린 만파식적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천삼백 년 전 동해에서 온 그 대나무 피리인지는, 끝내 누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안개 속 어스름한 경주의 옛 석탑과 능선, 사라진 것을 찾듯 텅 빈 고요한 풍경 (AI 생성 이미지)
안개 속 어스름한 경주의 옛 석탑과 능선, 사라진 것을 찾듯 텅 빈 고요한 풍경 (AI 생성 이미지)

사라졌기에 남은 것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어떤 이는 만파식적을 그저 신라 사람들이 지어낸 아름다운 전설로 여긴다. 실제로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 같은 것은 없었고, 다만 통일 직후의 불안한 신라가 왕권의 정당함과 나라의 평안을 하나의 신비로운 물건에 담아 낸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죽은 왕이 용이 되고 죽은 장군이 신이 되어 젊은 임금에게 신표를 내린다는 이 서사는, 새 왕이 하늘과 조상의 뜻을 받아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을 온 백성에게 보여 주는 더없이 훌륭한 이야기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만파식적은 처음부터 손에 잡히는 물건이라기보다, 신라라는 나라가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소원 그 자체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피리의 '사라짐'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만약 만파식적이 처음부터 상징일 뿐이었다면, 그것이 기록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소원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라가 안정되고 통일의 긴장이 풀리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를 그토록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소원이 옅어지면 신물(神物)의 이야기도 함께 옅어지는 법이다. 어쩌면 만파식적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절실하지 않게 된 순간 조용히 사람들의 마음에서 놓여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경주 앞바다에는 문무왕의 수중릉이 물결에 잠겨 있고, 그 뭍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세운 감은사의 두 석탑만이 천삼백 년째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만파식적의 실물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불기만 하면 전쟁이 멎고 병이 낫고 파도가 잔잔해진다는 그 피리의 이야기는, 실물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또렷이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만파식적이 정말로 지녔던 힘이었을 것이다. 손에 쥘 수 있는 보물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온 나라의 평안을 바라던 그 간절한 마음은 이야기가 되어 천삼백 년을 건너왔으니 말이다.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던 피리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그 소리는 아직도, 이렇게, 이야기 속에서 울리고 있다.

해질녘 동해를 배경으로 나란히 선 감은사 터의 두 석탑 원경,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AI 생성 이미지)
해질녘 동해를 배경으로 나란히 선 감은사 터의 두 석탑 원경,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AI 생성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