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충청남도 공주의 나지막한 야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의 삽이 단단한 무언가에 걸렸다. 흙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가지런히 쌓아 올린 잿빛 벽돌의 아치였다. 그것은 1500년 가까이 아무도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손 하나 닿지 않은 백제 왕의 무덤이었다. 삼국시대의 수많은 능이 도굴로 텅 비거나 주인을 알 수 없는 채 남아 있는 가운데, 이 무덤만은 안에 잠든 이가 누구인지 스스로 밝히고 있었다.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왕이었다. 해방 이후 최대의 발견이라 불릴 만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발견은, 단 하룻밤 만에 파헤쳐진 '한국 고고학 최악의 발굴'로 기록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무덤의 입구를 여는 순간 쏟아졌다는 폭우와, 이후 발굴에 관여한 사람들 사이에 이어졌다는 불운은 오늘날까지 '무령왕릉의 저주'라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그 여름밤에 벌어진 일에 관한 이야기다.

삽 끝에 걸린 1500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을 도읍으로 삼았던 시절의 왕과 왕족들이 묻힌 언덕이다. 오래전부터 이곳에는 여러 기의 고분이 알려져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도굴을 당해 안이 비어 있었다. 1971년 여름, 장마철이면 무덤 안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5호분과 6호분 뒤편으로 배수로를 파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저 물길을 내는 평범한 토목 공사였다.
그런데 7월 초, 삽질을 하던 인부의 손끝에 흙과는 전혀 다른 감촉이 전해졌다. 파 내려가자 정연하게 쌓인 벽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무덤이 나타난 것이다. 이 무덤은 그동안 도굴꾼의 손도, 세월의 훼손도 거의 겪지 않은 채 온전히 봉인되어 있었다. 15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완벽하게 밀봉된 무덤. 그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한반도 고고학사에 다시없을 발견이었다.

주인이 스스로 밝힌 무덤
발견 소식은 곧 학계에 전해졌고, 서둘러 조사단이 꾸려졌다.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의 널길을 지나 무덤 안으로 들어서자, 통로의 한가운데에는 밖을 향해 웅크린 기묘한 돌짐승 하나가 놓여 있었다. 머리에는 뿔이 돋고 몸에는 불꽃 같은 날개가 새겨진 이 상상의 동물은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 곧 진묘수(鎭墓獸)였다. 죽은 이의 안식을 어지럽히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무덤 앞에 두었다는 이 석수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사단을 진정으로 전율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진묘수 곁에 나란히 놓인 두 장의 얇은 돌판, 곧 지석(誌石)이었다. 거기에는 이 무덤에 잠든 이가 누구인지가 또렷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斯麻王)" — 사마왕은 곧 무령왕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삼국시대의 수많은 왕릉 가운데,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능은 이것이 유일했다. 왕이 언제 세상을 떠났고 언제 이 자리에 묻혔는지까지 기록으로 남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책이 흙 속에서 걸어 나온 셈이었다. 학자들이 그 앞에서 숨을 죽였을 순간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지석이 들려준 백제의 장례
지석은 단순히 왕의 이름만 알려 준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백제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던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무령왕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난 뒤, 곧바로 이 무덤에 묻힌 것이 아니었다. 왕의 시신은 한동안 다른 곳에 임시로 모셔졌다가,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정식으로 이 왕릉에 안치되었다. 삼년상이라는 긴 상례의 절차를 다 마친 뒤에 비로소 무덤의 주인으로 들어온 것이다.
왕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보다 몇 해 뒤에 세상을 떠난 왕비 역시 한동안 가매장의 시간을 거친 뒤, 삼년상을 마치고서야 남편 곁에 나란히 옮겨져 묻혔다. 사람들은 지석의 한 면에 왕의 기록을 새겼다가, 뒷날 왕비를 모실 때 그 판을 뒤집어 왕비의 기록을 새겨 넣었다. 죽은 이를 곧바로 땅에 묻지 않고 오랜 시간 정성껏 예를 갖춘 뒤에야 영원한 자리로 옮기는 이 '가매장 뒤 이장'의 관습은, 백제 왕실의 상장례 풍습을 보여 주는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무덤은 죽은 왕의 이름만이 아니라, 그를 떠나보낸 사람들의 마음까지 함께 봉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룻밤에 파헤쳐진 무덤
여기까지라면 이 이야기는 그저 눈부신 발견의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씁쓸하게 회자되는 진짜 이유는,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있다.
무덤이 열렸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발견 소식이 알려지자 취재진과 구경꾼이 야산으로 몰려들었고, 현장은 걷잡을 수 없이 어수선해졌다.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기록해 가며 진행해야 할 발굴은, 몰려드는 인파와 세간의 이목 앞에서 방향을 잃었다. 조사단은 유물이 훼손되거나 도난당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무덤 안의 모든 것을 서둘러 밖으로 꺼내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발전기로 켠 희미한 백열등 몇 개와 카메라 한 대가 장비의 전부였다. 학자들은 밤을 새워 유물을 상자에 쓸어 담았다.
그렇게 무령왕릉은 열린 지 단 하룻밤 만에, 반나절 남짓한 시간 만에 안을 완전히 비워냈다. 1500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무덤을 파헤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하루가 되지 않았다. 유물이 놓여 있던 위치와 그 관계를 세밀히 기록하는 일 — 고고학에서 유물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그 정보들은, 그 밤의 혼란 속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훗날 이 발굴은 '해방 이후 최고의 발견을 최악의 방식으로 망쳐 버린 사건'으로, 한국 고고학이 두고두고 반성하는 흑역사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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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잠긴 백제 벽돌무덤 묘실 안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카메라 — 분위기를 재현한 영상일 뿐, 실제 발굴 기록 영상이 아니다.
그 밤에 쏟아진 비, 그리고 저주라는 이야기
발굴의 졸속함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이, 그 곁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자라났다. 이른바 '무령왕릉의 저주'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발굴단이 무덤의 입구를 파헤치던 바로 그 순간 맑던 하늘에서 느닷없이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1500년 동안 어둠 속에서 봉인되어 있던 무언가를 건드린 데 대한 경고처럼 여겨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발굴이 끝난 뒤로도, 그 일에 관여했던 사람들 사이에 크고 작은 사고와 불운이 잇따랐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빚에 몰리고,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고,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이야기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 나갔다. 이집트 투탕카멘의 무덤을 둘러싼 '파라오의 저주' 이야기가 그러했듯, 무령왕릉에도 비슷한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저주'는 어디까지나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괴담이자 전설일 뿐,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실제로 작용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갑작스러운 여름 폭우는 장마철 공주 하늘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사람에게 일어난 불운을 하나의 무덤 탓으로 엮는 것은 그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의 방식일 뿐이다. 다만 한 가지, 곱씹어 볼 대목은 있다.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이 스스로 그 밤의 졸속함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평생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저주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덤이 내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서둘러 파헤치지 말았어야 했다'는 죄책감이 사람의 마음속에 스스로 드리운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작은 사고 하나에도 '혹시…' 하는 두려움을 덧씌운 것은, 어쩌면 무령왕이 아니라 사람의 양심이었다.

무덤이 남긴 것
무령왕릉에서는 금으로 만든 왕과 왕비의 관 꾸미개를 비롯해, 금 귀걸이와 목걸이, 청동 거울,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돌짐승 석수에 이르기까지 수천 점에 이르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뒷날 국보로 지정되었을 만큼, 이 무덤은 백제 문화의 정수를 통째로 품고 있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왕국'처럼 여겨지던 백제의 위상은, 이 무덤 하나로 완전히 새롭게 쓰였다. 화려한 금속 공예와 중국·왜(倭)와 교류한 흔적이 담긴 유물들은, 백제가 결코 변방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한 세련된 문화 강국이었음을 웅변했다.
그래서 무령왕릉의 이야기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백제사의 빈 페이지를 통째로 채워 넣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발견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 위대함을 담아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의 손에 하룻밤 만에 헤집어진,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이기도 하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때 놓쳐 버린 기록들을 아쉬워하며, 남겨진 유물과 과학의 힘을 빌려 그 밤에 사라진 정보를 조금씩 되짚어 가고 있다.
무령왕릉의 '저주'가 정말로 존재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1500년을 기다려 온 한 왕의 무덤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고 무엇을 앗아 갔는가 하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 여름밤의 이야기는, 오래된 것을 마주할 때 우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신중해야 하는지를 일깨우기 위해, 저주라는 이름을 빌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주의 그 야산은 오늘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그날 밤의 이야기를 묵묵히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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