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봉길리 해변에서 바다 쪽으로 200미터쯤 나아간 곳에 나지막한 바위섬 하나가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파도에 깎인 갯바위처럼 보이는 이 섬에는, 130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이야기가 얹혀 있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한 신라의 왕, 문무왕.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죽거든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 바다에 묻으라. 나는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유언이 향한 곳이 바로 이 바위섬, '대왕암(大王岩)'이다. 배를 타고 다가가 바위 위에 올라서면, 한가운데에 십(十) 자 모양으로 파인 수로가 드러난다. 사방에서 바닷물이 드나드는 그 안쪽에는, 거북의 등껍질을 닮은 넓적한 돌 하나가 물에 잠긴 채 고요히 놓여 있다. 사람의 손이 분명히 닿은 흔적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단 하나의 '바닷속 왕릉'. 그러나 오늘까지도 학자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 — 이 돌 아래에 정말 왕이 잠들어 있다고. 그 어떤 발굴에서도, 왕의 유골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왕, 문무왕
이야기의 주인공을 먼저 만나야 한다.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임금으로, 661년에 왕위에 올라 681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스무 해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시대는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쟁의 시기와 겹친다.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백제를 무너뜨린 뒤, 문무왕은 그 뒤를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한반도에 남아 있던 당나라 군대까지 밀어내며 마침내 삼국 통일을 완성한 왕이었다.
스무 해에 걸친 전쟁과 통치는 한 사람에게 결코 가벼운 짐이 아니었다. 나라의 경계를 지키는 일은 왕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끝나지 않는 숙제였다. 특히 당시 신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것은 동쪽 바다를 건너오는 왜구, 즉 일본 방면에서 오는 침략자들이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이 왕이 죽음을 앞두고 남겼다는 유언은, 그래서 더욱 서늘하고도 장엄하게 들린다. 왕의 몸은 스러질지언정, 나라를 지키려는 그 의지만은 죽음 뒤에도 멈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옛 기록은 문무왕의 마지막을 비교적 또렷하게 전한다. 왕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고 불교 방식에 따라 화장할 것을 당부했다. 무겁고 화려한 봉분을 쌓아 백성의 힘을 소진하는 대신, 자신을 태워 그 재를 동해에 묻으라 한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거대한 흙무덤을 만들어 왕의 권위를 드러내던 시대에, 스스로 무덤을 버리고 바다를 택한 왕이었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마디다. "나는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이 나라를 침범하는 무리를 물리치겠다." 한 신하가 "어찌 존엄하신 몸이 미물인 용이 되려 하십니까"라고 묻자, 왕은 "내가 나라를 위한 것이니, 짐승이 된들 무엇이 부끄럽겠는가"라고 답했다고 전한다. 왕이 되어 다시 태어나겠다는 것도, 하늘로 오르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바다의 짐승이 되어서라도 조국의 파도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의 유골은 활활 타오른 뒤, 육지가 아닌 저 동해의 바위섬으로 향했다.

사람의 손이 판 바위 — 대왕암의 내부
대왕암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전설이 얹힌 바위'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 작은 바위섬 위에 실제로 올라서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다. 자연이 우연히 만들어 낸 것이라 보기 어려운, 분명한 인공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위 한가운데는 마치 열십(十) 자를 그리듯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밀물이 들면 바닷물이 사방에서 흘러 들어오고 썰물이 지면 다시 빠져나간다. 자연 그대로의 바위였다면 이렇게 사방이 트인 수로가 우연히 생겨나기는 어렵다. 훗날 왕의 아들인 신문왕 때, 바닷물이 이 안을 늘 잔잔하게 드나들도록 물길을 다듬었다는 기록과도 맞물린다.
그리고 그 수로가 만나는 한가운데, 물에 잠긴 자리에 길이 3.7미터가량의 넓적하고 판판한 돌 하나가 놓여 있다. 남북으로 길게 누운 이 돌은 거북의 등껍질을 닮았다 하여 오래도록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해 왔다. 자연석의 안쪽을 파내고 그 위에 이 넓적한 덮개돌을 얹은 듯한 흔적은 비교적 뚜렷하다. 바닷물은 늘 이 돌을 덮었다가 드러냈다가 하며,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다. 파도에 씻기는 이 한 장의 돌이야말로, 1300년 동안 사람들이 품어 온 질문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그러나 유골은 나오지 않았다
이 바위섬을 '세계 유일의 해중왕릉'으로 부르려면, 결국 하나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정말 저 돌 아래에 왕의 유골이 묻혀 있는가.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장엄하던 이야기는 풀리지 않은 학술적 미제와 마주친다.
돌 아래를 직접 확인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01년, 한 방송 프로그램이 학자들과 함께 벌인 조사다. 밀려드는 바닷물을 임시로 막고 그 넓적한 돌 주변과 아래를 살핀 이 조사에서, 사람들이 기대했던 유골함이나 그것을 안치할 만한 구조물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돌 아래에는 유해를 묻기 위해 별도로 조성한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자연석의 안쪽을 파내 덮개돌을 놓기 위한 공간을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은 뚜렷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은 분명한데, 정작 그 손길이 '무엇을' 그 아래 두었는지는 드러나지 않은 셈이다. 바다 밑에서 오랜 세월 조사가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까지 겹치면서, 유골의 존재 여부는 오늘까지도 확정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덤인가, 재를 흩뿌린 자리인가
유골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왕암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한쪽에서는 이곳을 문자 그대로 왕의 '무덤(장골처)'으로 본다. 화장한 유골을 그릇이나 상자에 담아 저 넓적한 돌 아래에 실제로 안치했으며, 다만 1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센 바닷물과 조류에 쓸려 그 흔적이 사라졌거나, 아직 우리가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인공 수로와 덮개돌이라는 뚜렷한 조형 의지가, 이곳이 단순한 자연 바위가 아니라 '묻기 위해' 다듬어진 곳임을 말해 준다는 입장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곳을 유골을 '흩뿌린 자리(산골처)'로 본다. 애초에 유골을 한곳에 묻은 것이 아니라, 불교의 방식에 따라 화장한 재를 이 바다에 흩뿌린 것이라면, 돌 아래에서 유골함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이 견해에 따르면 대왕암은 왕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라기보다는, 그의 뜻과 넋이 깃든 상징적인 성소에 가깝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직 아무도 단정하지 못한다. 유골이라는 결정적 물증이 없는 한, 두 해석은 팽팽히 맞선 채 나란히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미결정 상태가, 이 바위섬을 지금도 신비로운 곳으로 남겨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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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새벽, 파도에 씻기는 바위섬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장면 — 분위기를 재현한 영상이며 실제 기록 영상이 아니다.
바다가 지켜 온 1300년의 물음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면, 대왕암을 둘러싼 여러 갈래가 한 자리에서 만난다. 죽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겠다던 한 왕의 유언, 그 유언을 좇아 화장으로 스러진 육신, 사람의 손이 분명히 다듬은 바닷속 인공 수로와 거북 등을 닮은 넓적한 돌, 그리고 그 아래에서 끝내 나오지 않은 유골. 이 모든 조각들은 각각으로는 또렷하지만, 하나로 이으면 여전히 하나의 물음표로 남는다.
흥미롭게도, 이 바위섬이 국가의 사적으로 공식 지정된 날은 1967년 7월 24일 — 오늘로부터 꼭 이맘때다. 지정 당시에도, 그 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곳이 진짜 왕의 무덤이 맞는가'라는 질문은 완전히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초자연적인 저주나 용의 전설로 이 미결을 서둘러 덮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가 오래도록 사람을 붙드는 힘은, 명백한 인공의 흔적과 명백한 유골의 부재라는 두 사실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데 있다. 분명히 누군가 이 바다를 다듬었고, 분명히 그 아래에서 그가 잠들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오늘도 봉길리 앞바다에는 파도가 친다. 밀물이 들면 그 넓적한 돌은 다시 물에 잠기고, 썰물이 지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또 사라진다. 삼국을 통일한 왕이 정말 저 아래에 잠들어 용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의 재가 이 바다 어딘가로 흩어져 오래전에 파도가 되었는지 — 동해는 1300년이 넘도록 그 답을 내놓지 않은 채, 오늘도 그 바위섬을 조용히 씻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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