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초등학생 다섯 명이 집을 나섰다. 우철원, 조호연, 김영규, 박찬인, 김종식 — 아홉 살에서 열세 살 사이의 동네 친구들이었다. 그날은 지방선거 임시공휴일이라 학교도 쉬었고, 아이들은 집 근처의 나지막한 산 와룡산으로 향했다. 목적은 도롱뇽 알을 잡는 것이었다. 훗날 이 사건이 '개구리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온 나라에 알려지지만, 사실 아이들이 잡으러 간 것은 개구리가 아니라 도롱뇽 알이었다. 봄이면 산속 개울가에서 알을 건지는 일은 그 시절 아이들에게 흔한 놀이였다. 다섯 소년은 "곧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산으로 올라갔고, 그날 이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연인원 수십만 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에도 아이들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11년 6개월이 지난 어느 가을날, 다섯 명 모두가 집에서 멀지 않은 산 중턱에서 유골로 발견됐다.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 중 하나로 남은 개구리소년 이야기다.


1991년 그날, 다섯 아이가 산으로 갔다
1990년대 초의 한국은 지금과 사뭇 다른 나라였다. 서울올림픽을 막 치른 뒤였고, 도시는 빠르게 팽창하고 있었지만 대구 성서 같은 외곽 지역에는 아직 논밭과 나지막한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산은 놀이터였다. 학원 대신 동네 골목과 산자락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봄이 오면 개울가로 몰려가 올챙이와 도롱뇽 알을 건지는 것이 계절의 놀이였다. 와룡산은 성서 마을을 굽어보는 해발 300미터 남짓의 야트막한 산으로, 어른들도 아이들도 스스럼없이 오르내리던 익숙한 뒷산이었다.
3월 26일 아침, 다섯 아이는 각자의 집을 나서 함께 산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의 증언이 뒤에 남았지만, 그 뒤로 아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이 되어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섯 집의 부모가 동시에 아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한두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 한꺼번에 사라졌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부모들은 밤을 새워 산을 뒤졌고, 이튿날 경찰에 실종 신고가 접수되면서 사건은 곧 마을을 넘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사상 최대의 수색, 그리고 실패
다섯 아이가 한날한시에 사라졌다는 소식은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수색을 지시했고, 경찰과 군 병력이 대규모로 투입됐다. 수색에 동원된 인원은 연인원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와룡산은 헬리콥터가 상공을 돌고 수색견이 골짜기를 훑는 가운데 몇 번이고 샅샅이 뒤져졌다. 기록에 따르면 이 산에 대한 수색만 500회가 넘었다. 텔레비전은 매일같이 수색 상황을 생중계했고, 아이들의 얼굴이 그려진 실종 전단은 전국의 담벼락과 전봇대에 붙었다. 우유갑과 성냥갑에까지 아이들의 사진이 인쇄됐다. 단일 실종 사건으로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수색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온갖 제보와 추측이 쏟아졌다. 누군가 아이들을 데려갔다는 유괴설, 산속에서 길을 잃고 조난당했다는 설, 심지어 인근 군부대의 오폭이나 사고에 휘말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한 대학교수가 아이들의 부모 중 한 명을 범인으로 지목하며 집 마당을 파헤치는 소동을 벌였다가 훗날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단서도 다섯 아이의 행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의 관심은 서서히 옅어졌고, 아이들의 부모만이 지치지 않고 전국을 돌며 아이를 찾아 헤맸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1년 6개월 뒤, 산에서 돌아온 아이들
2002년 9월 26일, 사건이 잊혀 갈 무렵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랐던 주민들이 산 중턱에서 사람의 뼈와 옷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그곳에서 다섯 아이의 유골을 모두 확인했다. 실종된 지 11년 6개월 만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발견된 장소였다. 아이들이 발견된 곳은 마을에서, 그리고 아이들의 집에서 불과 수백 미터에서 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산 중턱이었다. 500회가 넘게 뒤졌다던 그 산, 헬기와 수색견까지 동원됐던 바로 그 산에서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이 뒤졌는데 어떻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아이들을 찾지 못했을까. 이 물음 자체가 사건의 또 다른 수수께끼가 됐다. 안타깝게도 유골이 발견된 직후의 수습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전문 감식팀이 현장을 온전히 보존하기 전에 발굴이 진행되면서, 범인을 특정할 수 있었을지 모를 미세 증거들 — 이물질이나 흔적 — 이 훼손됐다는 지적이 훗날 제기됐다.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첫 번째 기회가, 발견의 순간에 상당 부분 흩어져 버린 셈이다.


타살의 증거 — 두개골에 남은 손상
유골 감정은 경북대학교 법의학팀이 맡았다. 초기에 일부에서는 아이들이 산속에서 길을 잃고 추위 속에 저체온으로 숨졌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거론됐다. 3월 말의 산속은 밤이면 얼어붙을 만큼 추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골을 정밀 감정한 법의학팀의 결론은 이 '조난·저체온사'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다섯 아이 가운데 세 아이의 두개골에서 뚜렷한 손상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법의학팀이 주목한 것은 그 손상의 성격이었다. 단순히 넘어지거나 자연적으로 부서진 흔적이 아니라, 무언가로 여러 차례 가격당했을 때 생기는 규칙적이고 인위적인 자국이 두개골에 남아 있었다. 이는 아이들이 스스로 조난을 당해 숨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소견이었다.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법의학팀은 이 사건을 타살로 잠정 결론 내렸다. 도롱뇽 알을 잡으러 산에 올랐던 다섯 아이가, 그 산에서 누군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참혹한 사실이 11년 만에 확인된 것이다.

흉기의 수수께끼
타살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정작 아이들을 살해한 도구가 무엇이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이것이 이 사건의 핵심적인 미궁 중 하나다. 두개골에 남은 손상 자국의 모양과 간격을 두고 여러 추정이 나왔다. 어떤 이는 예리한 금속 공구를 떠올렸고, 어떤 이는 둔기나 농기구 같은 것을 지목했다. 손상 흔적이 특정한 형태를 지녔다는 점에서, 흉기가 단순한 돌멩이나 나무 막대기 같은 것은 아니었으리라는 데에는 어느 정도 견해가 모였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법의학계 어디에서도 "이것이 흉기다"라고 특정해 확정하지는 못했다.
흉기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수사에 큰 벽이 됐다. 흉기의 정체는 곧 범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환경에 있었던 인물인지를 가리키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도구를 다루는 사람이었는지, 그 도구를 어디서 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수사의 범위는 크게 좁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흉기가 안갯속에 남으면서, 범인의 윤곽도 함께 흐릿한 채로 남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수사기관도 특정하지 못한 흉기를, 한 이름 없는 네티즌이 추론해내며 화제를 모은 것이다.

한 네티즌의 '캘리퍼스' 분석 — 소름 돋는 아이러니
2022년 6월 1일, 인터넷 커뮤니티 네이트판에 "나는 개구리소년 사건의 흉기를 알고 있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2011년 이 사건을 재조명한 한 방송에서 아이들의 두개골 손상 흔적을 본 순간, 그 흉기가 무엇인지 직감했다고 적었다. 그가 지목한 도구는 '버니어캘리퍼스(vernier caliper)'였다. 버니어캘리퍼스는 물체의 길이나 두께를 정밀하게 재는 공업용 측정도구로, 두 개의 뾰족한 금속 조(jaw)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글쓴이는 두개골에 파인 자국의 모양과 간격이 이 캘리퍼스의 뾰족한 양날로 내리쳤을 때 생기는 흔적과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망치 같은 둔기만으로는 그런 규칙적인 자국이 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에 정황까지 덧붙였다. 아이들이 사라진 와룡산 인근에 공업계열 고등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 학생들이 실습용으로 버니어캘리퍼스를 들고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범인이 그 도구에 익숙한 인근의 누군가였을 수 있다는 추론이었다. 글은 순식간에 온라인을 뒤흔들었고, 수사기관조차 특정하지 못했던 흉기를 일반인이 정밀하게 짚어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소름을 느꼈다. 범죄심리 전문가인 이수정 교수는 방송에서 이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며, 캘리퍼스의 날카로운 끝이 그 정도의 손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글쓴이가 어떤 구체적인 정보를 접했거나 경험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확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만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캘리퍼스 흉기설'은 어디까지나 한 네티즌의 추론이자 가설일 뿐, 공식 수사에서 흉기로 확정된 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대구 경찰은 사건 당시에도 버니어캘리퍼스가 흉기라는 제보가 있어 이를 검토했으나, 두개골의 손상 흔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이 글이 화제가 되자 경찰은 작성자와 접촉을 시도하며 다시 살펴볼 여지가 있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것이 캘리퍼스를 진범의 흉기로 확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전문가도, 경찰도 특정하지 못한 흉기를 이름 없는 한 사람이 그럴듯하게 추론해낸 이 상황 자체가 사건의 또 다른 오싹한 단면일 뿐,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공소시효 만료, 그리고 영구 미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고 타살이 확인됐지만, 수사에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형사 공소시효 제도상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었고, 사건 발생 시점인 1991년으로부터 계산해 2006년 3월,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설령 이제 와서 범인을 찾아낸다 해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개구리소년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다. 훗날인 2015년, 한국은 이른바 '태완이법'을 통해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했지만, 이미 시효가 지나 버린 이 사건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았다.

개구리소년 사건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으로 꼽힌다. 이 가운데 화성 사건은 2019년 뒤늦게 진범이 밝혀졌지만, 개구리소년 사건은 여전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다섯 아이의 부모들은 오랜 세월 아이를 찾아 헤맸고, 그중 몇몇은 진실을 끝내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도롱뇽 알을 잡으러 잠깐 산에 다녀오겠다던 다섯 아이는, 그렇게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미스터리 중 하나가 됐다.
남는 질문

오늘날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1991년 3월 26일, 다섯 아이가 도롱뇽 알을 잡으러 와룡산에 올랐다. 사상 최대의 수색에도 발견되지 않다가, 11년 6개월 뒤 집에서 멀지 않은 산 중턱에서 다섯 명 모두 유골로 발견됐다. 두개골의 손상은 이들이 살해당했음을 가리켰다. 그리고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사건은 영구 미제가 됐다. 확실한 것은 여기까지다.
그 너머의 질문들은 여전히 답이 없다. 누가, 왜, 어떻게 다섯 아이를 산에서 살해했나. 그 도구는 정말 무엇이었나. 어째서 그토록 여러 번 뒤졌던 산에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아이들을 11년이나 찾지 못했나. 한 네티즌의 캘리퍼스 추론은 소름 돋는 상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조차 확인되지 않은 하나의 가설로 남아 있다. 도롱뇽 알을 건지러 잠깐 산에 올랐던 다섯 소년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 와룡산은 30년이 넘도록 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