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예산, 가야산의 남쪽 자락으로 접어들면 소나무 사이로 봉긋하게 솟은 무덤 하나가 나타난다. 겉모습만 보면 여느 옛 무덤과 다를 것이 없다. 봉분이 있고, 그 앞에 상석과 문인석이 서 있고, 산이 병풍처럼 무덤을 감싼다. 그러나 이 조용한 봉분은 조선 후기 역사에서 가장 기이하고 격렬한 사건 하나를 품고 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다. 그리고 '2대에 걸쳐 임금이 나온다'는 명당 전설이 서린 자리이자, 1868년 어느 봄밤 바다 건너 서양에서 온 상인이 삽과 횃불을 든 무리를 이끌고 기어이 파헤치려 했던 무덤이기도 하다. 그가 노린 것은 무덤 속의 금은보화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무덤 깊숙이 잠들어 있는 왕족의 관 그 자체였다.

절을 불태우고 얻은 명당
이야기는 도굴이 벌어지기 훨씬 전, 한 남자의 야심에서 시작된다. 훗날 어린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조선의 실권을 틀어쥐게 되는 인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아직 권력의 언저리에도 닿지 못했던 젊은 시절, 그는 몰락한 왕족의 후손으로 불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귀에 한 지관(地官)이 속삭인 이야기가 있었다. 충청도 가야산에, 두 대에 걸쳐 천자(天子), 곧 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 불린 이 명당의 전설이, 한 사람의 운명과 조선의 운명을 함께 뒤흔들게 된다.
문제는 그 명당의 한복판에 이미 다른 것이 서 있었다는 데 있다. 가야사(伽倻寺)라는 오래된 절과, 그 절의 금탑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가진 재산을 털어 절의 승려들을 움직였고, 마침내 가야사에 불을 놓아 절을 폐사시켰다고 전한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에서도 이 자리에서 사찰이 무너지고 탑이 철거된 흔적이 확인되면서, 한낱 야사로만 여겨지던 이야기가 실제 사실에 가깝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유해는 그렇게 불타 사라진 절터, 금탑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로 옮겨졌다.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신앙의 자리를 지웠고, 무덤 하나가 그 위에 새로 솟았다.

명당은 정말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단순한 미신담으로 흘려버릴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 나온다. 남연군의 묘를 이 자리로 옮긴 뒤, 흥선대원군의 집안에서는 실제로 임금이 나왔다. 이장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태어난 그의 둘째 아들이 열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조선 제26대 임금이자 훗날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는 고종이다. 그리고 고종의 뒤를 이은 아들 순종까지, 그의 후손에게서 두 대에 걸쳐 임금이 나왔다. '2대에 걸쳐 천자가 난다'던 지관의 말은, 무섭도록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물론 냉정하게 보면 이는 결과를 알고 난 뒤에 전설을 끼워 맞춘 것일 수도 있다. 풍수의 예언이 왕을 낳은 것이 아니라, 왕이 난 뒤에 그 자리를 명당으로 떠받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에게 이 무덤은 단순한 봉분이 아니었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 '살아 있는 명당', 흥선대원군 권력의 근원이자 상징이었다. 무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역이 되었고, 그 봉분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느냐는 곧 조선 왕실의 자존심과 직결된 문제였다. 바로 그렇기에, 이 무덤은 노림수의 표적이 되었다.
관을 인질로 삼겠다는 발상
시선을 잠시 조선 바깥으로 돌려 보자. 이 무렵 조선의 굳게 닫힌 문을 억지로 열어 보려던 서양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독일 출신의 상인 오페르트다. 상하이를 근거로 장사하던 그는 앞서 두 차례나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쇄국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거절당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조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발상에 이른다.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면, 그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무언가를 손에 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원군의 아버지가 잠든 관이었다.
발상은 서늘할 만큼 계산적이었다. 효(孝)를 무엇보다 앞세우던 조선에서, 그것도 최고 권력자의 아버지 유해와 관을 손에 넣는다면, 대원군은 이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통상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유해를 인질로 삼아 나라의 빗장을 열겠다는 것이다. 오페르트는 프랑스인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들을 끌어들이고, 미국인 젠킨스에게서 자금을 받아 백수십 명에 이르는 무리를 꾸렸다. 그렇게 1868년 봄, 이들을 실은 배가 서해를 가로질러 충청도 앞바다로 향했다.

가야산의 봄밤, 삽과 횃불
1868년 봄, 오페르트 일행을 태운 배는 덕산 앞 구만포에 닿았다. 뭍에 오른 무리는 곧장 덕산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빼앗고, 민가를 뒤져 곡괭이와 삽 같은 발굴 도구를 그러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둠을 틈타 가야산으로, 남연군의 묘를 향해 곧장 올라갔다. 밤이 깊자 횃불이 무덤가를 밝혔고, 삽질이 시작되었다. 조선 왕실이 성역으로 떠받들던 명당의 봉분이, 바다 건너에서 온 이방인들의 손에 파헤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서늘하다. 소나무가 둘러선 고요한 능선, 그 아래 두 대에 걸쳐 임금을 낳았다는 무덤, 그리고 그 봉분을 에워싼 채 흙을 파내려가는 검은 실루엣들과 흔들리는 횃불. 그러나 그날 밤 가야산에서 벌어진 일은, 도굴꾼들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들은 봉분을 파고 또 팠지만, 정작 관에는 끝내 손도 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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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가야산의 밤, 무덤가에 흔들리는 횃불 불빛 — 분위기를 재현한 영상이며 실제 기록 영상이 아니다.
관에 닿지 못한 자들
도굴꾼들의 삽을 막아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무덤 그 자체의 견고함이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관을 흙 속에 그냥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둘레를 석회와 흙, 모래를 반죽해 다져 넣은 단단한 회곽(灰槨)으로 감쌌다. 세월이 지나면 이 회곽은 돌덩이처럼 굳어, 웬만한 힘으로는 깨뜨릴 수 없는 벽이 된다. 남연군의 묘 역시 이 견고한 회곽이 관을 철벽처럼 감싸고 있었다. 밤새 파내려간 도굴꾼들의 곡괭이와 삽은 이 단단한 벽 앞에서 번번이 튕겨 나왔다. 옛 기록은 이 대목을 '묘광이 견고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짧게 전한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밤이 새고 동이 터 오자, 발각을 두려워한 무리는 관에 이르지 못한 채 파던 흙을 그대로 두고 서둘러 산을 내려가 배로 달아났다. 두 대의 임금을 낳았다는 명당의 봉분은 파헤쳐졌지만, 그 안에 잠든 왕족의 관은 끝내 이방인의 손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해를 인질 삼아 나라의 문을 열겠다던 오페르트의 계획은, 돌처럼 굳은 회곽 한 겹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파헤쳐진 무덤이 남긴 것
도굴은 실패했지만, 그 여파는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덤이 이방인의 삽에 파헤쳐졌다는 소식을 들은 흥선대원군의 분노는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조선이 그토록 지키려던 효의 상징이자 권력의 근원인 무덤을 서양인이 파헤쳤다는 사실은, 대원군에게 서양이란 곧 조상의 무덤조차 파헤치는 야만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통상을 위해 벌인 일이 오히려 통상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한층 더 견고해졌고, 앞서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탄압 또한 더욱 거세졌다. 서양과 손잡을 여지는 스스로 무너져 내렸고, 조선은 문을 더 굳게 걸어 잠갔다. 무덤 하나를 파헤치려던 하룻밤의 시도가, 한 나라가 세계를 향해 문을 여닫는 방향까지 바꿔 놓은 셈이다. 정작 노림수의 표적이던 관은 흙 한 겹 아래에서 끝내 무사했지만, 그 무덤을 둘러싼 파장은 이후 조선의 역사를 통째로 흔들었다.

명당 위에 남은 물음
오늘날 가야산 자락의 남연군 묘는 다시 고요하다. 파헤쳐진 흙은 오래전에 메워졌고, 봉분은 여느 무덤처럼 조용히 소나무 사이에 잠겨 있다. 그러나 이 조용한 봉분 위에는 지워지지 않는 물음들이 여전히 얹혀 있다.
절을 불태우고 얻었다는 명당, 그 자리에서 정말로 두 대에 걸쳐 임금이 나왔다는 사실. 그것이 풍수의 예언이 이룬 일인지, 아니면 우연한 결과에 전설이 나중에 덧입혀진 것인지 — 누구도 단정하지 못한다. 바다 건너 상인이 관을 인질 삼아 나라의 문을 열겠다는 기이한 발상에 이르렀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발상이 돌처럼 굳은 회곽 한 겹 앞에서 무너졌다는 사실. 만약 그날 밤 회곽이 조금만 무르고, 동이 조금만 늦게 텄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명당의 전설과 도굴의 야심이 한 무덤 위에서 맞부딪힌 이 사건은, 초자연적인 저주로 서둘러 덮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오래도록 사람을 붙드는 힘은, '왕을 낳았다는 무덤'과 '그 무덤을 파헤치려 한 이방인'이라는 두 사실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데 있다.
오늘도 가야산에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가 흔들리고, 봉분 위로 볕이 들었다가 그늘이 진다. 두 대의 임금을 낳았다는 이 자리가 정말 하늘이 정한 명당인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 낸 이야기인지 — 가야산은 백 년이 훌쩍 넘도록 그 답을 내놓지 않은 채, 오늘도 그 무덤을 조용히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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