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20일,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부산교도소의 새벽. 한 무기수가 화장실 천장 근처의 좁은 환풍구 앞에 서 있었다. 가로 32센티미터, 세로 28센티미터. 성인 남성의 어깨가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크기였다. 그러나 그 앞에 선 남자는 더 이상 두 달 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끼니를 굶어 가며 몸무게를 15킬로그램이나 줄였고, 쇠창살은 이미 신발 밑창에 숨겨 들여온 손바닥만 한 쇠톱날로 오래전에 잘라 두었다. 남자는 기름을 바른 몸을 비틀어 그 작은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이름은 신창원. 이후 907일 동안, 대한민국 경찰 연인원 97만 명이 이 한 사람을 쫓게 된다. 세상을 뒤흔든 탈옥과 추격의 이야기는, 바로 그 새벽의 좁은 환풍구에서 시작됐다.

무기수가 되기까지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왜 그 담장 안에 있었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미화하거나 에두를 이유가 없는 사실이다. 1989년, 신창원은 4명의 공범과 함께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가정집에 강도로 침입했다. 그 과정에서 집주인이 목숨을 잃었다. 직접 흉기를 휘두른 것은 공범 중 하나였지만, 강도 범행에 함께 가담한 신창원 역시 법적으로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함께 졌다. 강도치사. 한 가정을 무너뜨린 이 범죄로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그의 출발점이다. 이후 벌어지는 그 어떤 화려한 도주극도, 그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강도였다는 사실을 지우지는 못한다.
무기징역을 확정받은 신창원은 청송교도소를 거쳐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됐다. 담장 밖으로 나갈 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평생을 그 안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에게, 담장은 세상의 끝이자 시간 그 자체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종류의 계획이, 조용히 그의 머릿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두 달간의 톱질
탈옥은 충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몇 달에 걸친, 소름 끼치도록 치밀한 준비의 결과였다. 1996년 10월, 신창원은 교도소 안 영선(營繕) 창고에서 길이 15센티미터 남짓한 쇠톱날 두 개를 손에 넣었다. 그는 이 톱날을 신발 밑창 고무에 홈을 파서 숨긴 뒤, 감쪽같이 자신의 방으로 들여왔다. 교도관의 눈을 피해 흉기가 될 수 있는 금속을 방 안까지 반입한 것이다. 이 작은 톱날 두 개가, 훗날 대한민국 교정 역사에 가장 큰 구멍을 뚫는 도구가 된다.
그날 이후 신창원은 매일 밤, 하루 20분씩 톱질을 했다. 환풍구를 막고 있는 쇠창살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갈아 나갔다. 톱질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물을 적셔 가며, 절단면이 발각되지 않도록 비누와 밥풀을 개어 감쪽같이 메워 두었다. 낮에는 아무 일 없는 무기수였고, 밤에는 자신의 탈출로를 파는 사람이었다. 이 이중생활이 두 달 가까이 이어졌다. 그가 자른 것은 쇠창살만이 아니었다. 무기징역이라는, 결코 뚫릴 것 같지 않던 시간의 벽에도 그는 매일 밤 조금씩 톱을 대고 있었던 셈이다.

15킬로그램을 지운 몸
그러나 쇠창살을 자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장 큰 난관은 환풍구 그 자체였다. 가로 32센티미터, 세로 28센티미터. 이 구멍은 사람이 빠져나가라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체격의 성인이라면 머리는 들어가도 어깨에서 반드시 걸리고 마는, 그런 크기였다. 신창원은 이 물리적 한계 앞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자신의 몸을 그 구멍에 맞게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는 끼니를 굶기 시작했다. 나오는 식사를 거르고, 물로 배를 채우며 몸을 말려 나갔다. 두 달에 걸쳐 그의 몸무게는 무려 15킬로그램이 빠졌다(일부 기록은 20킬로그램까지 줄었다고 전한다). 앙상해진 어깨와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의 감량이었다. 탈옥을 결심한 사람의 육체적 의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그의 줄어든 몸이 말없이 증언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새벽, 그는 기름칠한 몸을 비틀어 32센티미터의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교회 신축 공사장 쪽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 그는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아침 점호에서 그의 부재가 확인됐을 때, 신창원은 이미 부산 어딘가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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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환풍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카메라 — 실제 기록 영상이 아니라 사건의 분위기를 재현한 연출 클립이다.
907일, 4만 킬로미터의 그림자
여기서부터 대한민국 범죄사에 유례가 없는 도주극이 시작된다. 신창원은 붙잡히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무려 907일 동안. 그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대구에서 광주로, 전국 각지를 유령처럼 넘나들었다. 그가 도피 기간에 이동한 거리는 약 4만 킬로미터로 추산된다. 지구 둘레에 맞먹는 거리를, 그는 수배 사진이 온 나라에 뿌려진 채로 움직였다.
도피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신창원은 907일 동안 100건이 넘는 강도와 절도를 저질렀고, 그렇게 빼앗은 돈은 9억 원에 달했다. 도주 그 자체가 또 다른 범죄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훔친 돈으로 여러 곳에 은신처를 마련했고, 성형을 시도하고, 외모를 바꿔 가며 추적을 따돌렸다. 수사기관이 한 발 다가서면 그는 이미 다른 도시에 있었다. 경찰의 검문검색은 번번이 그를 코앞에서 놓쳤다. 실체는 분명히 그 땅 위를 걷고 있는데, 손에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그림자. 시간이 갈수록 신창원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을 넘어, 국가의 공권력을 조롱하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갔다.

97만 명이 쫓은 한 사람, 그리고 '의적'이라는 허상
경찰의 자존심은 갈수록 무너졌다. 무기수가 교도소 환풍구로 사라진 것부터가 전례 없는 망신이었는데, 그를 잡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국민의 불신은 커졌다. 신창원 검거에 동원된 경찰 인력은 도합 연인원 97만 명에 이르렀다. 그의 얼굴이 인쇄된 수배 전단은 수백만 장이 전국에 뿌려졌고, 현상금이 내걸렸으며, 그가 나타났다는 제보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졌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 방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리한 추격전은 신창원을 전국구 '유명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여기서 이 사건의 가장 씁쓸한 대목이 등장한다. 일부 대중이 그를 '의적'으로 치켜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강도이자 100건 넘는 범죄를 저지른 도피범을, 마치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낭만적 도망자처럼 소비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검거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원색의 알록달록한 티셔츠는 '신창원 티셔츠'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됐고, 심지어 그를 추종하는 팬클럽 비슷한 것까지 등장했다. 이른바 '신창원 신드롬'이었다.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한다. 이 '의적' 프레임은 당시 사회가 만들어 낸 현상일 뿐, 그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어떤 근거도 되지 못한다. 한 가정은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고, 907일 동안 또 다른 피해자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 세상이 그를 어떻게 소비했든, 그는 도망치는 범죄자였다.

전화 한 통으로 끝난 도주, 그리고 남은 것
907일간 온 나라를 조롱하던 도주극은, 뜻밖에도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끝났다. 1999년 7월 16일, 전라남도 순천의 한 아파트. 신창원은 이곳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조용히 숨어 있었다. 그날 그 집에 가스레인지를 수리하러 온 한 수리공이 있었다. 육군 정보부대 부사관 출신이었던 그는 눈썰미가 남달랐다. 집 안에 있던 남자의 수상한 외모와 어딘가 어색한 생활환경이 그의 기억 속 수배 전단과 겹쳤다. 그는 밖으로 나와 조용히 경찰에 신고했다. "신창원과 비슷한 사람을 봤다."
경찰 50여 명이 아파트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5시 20분, 대한민국을 2년 6개월 동안 술렁이게 했던 그 도주극은 마침표를 찍었다. 붙잡히는 순간, 신창원은 담담하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제가 신창원입니다." 연인원 97만 명의 경찰과 수백만 장의 전단, 그리고 4만 킬로미터의 도주로 이어졌던 거대한 추격의 끝은, 한 시민의 예리한 눈썰미와 전화 한 통이었다. 가장 정교하게 준비된 탈출을, 가장 사소한 일상이 무너뜨린 셈이다.
붙잡힌 신창원은 다시 담장 안으로 돌아갔다. 탈옥과 도피 기간에 저지른 범죄가 더해지면서 그의 형량은 무기징역 위에 22년 6개월이 얹혔고, 그는 가장 엄중한 관리 대상이 되었다. 32센티미터 구멍을 뚫고 나갔던 그의 '자유'는 907일로 끝났고, 그 대가로 그는 다시는 열리지 않을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건이 남긴 뼈아픈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한때 그를 영웅처럼 바라보았는가.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막연한 분노가, 어떻게 한 강도이자 도피범을 낭만의 옷을 입혀 소비하게 만들었는가. '신창원 신드롬'은 신창원이라는 개인보다, 오히려 그를 바라보던 우리 사회의 어떤 허기를 더 정확하게 비추는 거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울 속 이야기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 시작점에 무너진 한 가정과 목숨을 잃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907일의 그림자가 걷힌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그 무거운 사실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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